[책갈피 속의 오늘]1963년 미국-소련 핫라인 설치 합의

  • 입력 2007년 6월 20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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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병력을 대거 이동시킨 것을 포착한 미국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곧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설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요? 나는 그런 얘기 들어보질 못했는데요. 국방장관에게 물어보죠.” 브레즈네프의 반응이었다. 그는 국방장관에게 묻는 척하더니 “그런 일 없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크렘린 보좌관을 지낸 인사가 훗날 증언한 목격담이다.

세계의 양대 초강대국 최고 지도자 사이에서도 얼마 뒤면 드러날 뻔한 거짓말이 오간 것이다. 더구나 상호 신뢰 구축을 위해 미국 백악관과 소련 크렘린을 직통 연결한 미소 핫라인을 통해서였다.

미국과 소련은 1963년 6월 20일 핫라인 설치에 합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양국 정상이 직접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통신 수단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제3차 세계대전, 그것도 핵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피 말리는 벼랑 끝 외교가 벌어지던 상황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의 3000단어짜리 암호 전문을 푸는 데만 거의 12시간이 걸렸다. 미국이 답장을 쓰는 동안 이미 소련이 보낸 또 다른 강경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런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우발적 사고와 오판으로 인한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더욱 빠른 직통 통신 수단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설치된 것이 바로 ‘붉은 전화(red telephone)’라고 불린 핫라인이었다.

‘붉은 전화’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핫라인은 실제 전화가 아닌 고속 텔레타이프라이터(전신타자기)였고 1970년대 중반에야 실제 전화기로 대체됐다. 즉각적인 구두 통신은 오히려 잘못된 의미 전달을 불러오거나 상대의 심중을 잘못 읽을 수 있게 만든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핫라인이 처음 사용된 것은 설치된 지 4년 뒤인 1967년 아랍-이스라엘 간 ‘6일전쟁’ 때였다. 양국은 혹시라도 상대가 도발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군사적 이동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며 확전을 막았다.

냉전시대에 핫라인은 가공할 핵무기로 무장한 두 슈퍼 파워가 상호 확증(確證)파괴(MAD·Mutual Assured Destruction)의 핵전쟁에 이르기 직전 시도할 수 있는 마지막 담판, 일말의 희망을 의미했다. 다행히 핵전쟁을 막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붉은 전화를 드는 상황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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