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헐버트, 헤이그 제4의 밀사”

  • 입력 2007년 6월 13일 03시 01분


코멘트
고종이 헐버트에게 수여한 특사증의 사본. 상대국은 9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으로 헐버트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제공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고종이 헐버트에게 수여한 특사증의 사본. 상대국은 9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으로 헐버트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제공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100주년…국내외 의미 재조명 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지 꼭 100년이 됐다. 독립에 대한 ‘최후의 희망’이었던 만국평화회의 참가가 좌절되면서 조선은 3년 뒤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만국평화회의 100주년을 맞아 학계에서 그 의미를 재조명하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15일 고려대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와 대한제국, 그리고 열강’은 조선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국제적 배경을 조명하는 자리다. 평화회의를 주관했던 당시 열강들이 참가를 불허한 데 일본의 방해 공작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러나 최신 연구 결과들은 일본의 방해가 아니더라도 이미 열강들 사이에서 조선의 불참은 확정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최정수 한양대 교수에 따르면 고종과 대표단이 기대를 걸었던 미국은 되레 조선의 불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만국평화회의의 제안자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문명화된 유럽과 아시아로 하여금 약하고 무질서한 나라들에 대하여 일종의 경찰 시스템(police system)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며 국제집단안보체제를 지향했다는 것. 최 교수는 조선이 미국의 의도를 완전히 오판했다고 분석했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앙숙이었던 러시아 역시 힘이 되지 못했다.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에 따르면 이즈볼스키 외교장관은 러-일전쟁 패전 후 국내 개혁을 위해서는 안정적 대외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해 대일 접근 카드로 헤이그 회의에 조선을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중립국인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쿤 키스테르 네덜란드 레이던대 교수가 공개한 당시 헤이그 회의 부총재 드 보포트의 일기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 및 만주 지배에 곤란을 겪으면 우리의 동인도제도(인도네시아)에 눈길을 돌릴 것’이라며 일본을 지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8일 열린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정숭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연구원은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이 친일개화파로 활동하다가 항일파로 거듭난 변화상을 분석했다. 자유민권론자로 대한제국정부의 강력한 비판자이자 일본에 우호적이던 그는 을사늑약을 계기로 반정부투사에서 반일투사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정 연구원은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지식인의 아집 없이 시대적 요구에 온몸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미국인 헐버트가 고종에게서 받은 ‘특사증’을 공개하고 ‘헤이그 특사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 외에 헐버트까지 추가해 4인조’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또한 평화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07년 5월 일본 외무대신이 사이토 주네덜란드 일본공사에게 헐버트의 감시를 지시한 기밀문서를 공개하며 그동안 숨겨 왔던 헐버트의 역할에 대해 ‘이준 등 세 명의 열사로부터 일본의 감시망을 따돌리는 것’이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