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영진]한국영화의 괴물 ‘스크린 과점’

  • 입력 2007년 5월 26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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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할리우드 대작 영화 대열의 선봉에 나선 ‘스파이더맨3’가 4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이달 중순 전국 41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한 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모습이다.

이 영화는 해묵은 스크린 과점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개봉 첫 주에는 전국 스크린의 절반에 가까운 816개 스크린에 걸렸다. 스크린 수는 2주 만에 600여 개로 다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세력이다. 올해부터는 스크린쿼터 일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극장이 마음만 먹으면 훨씬 더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스크린에 걸 수 있게 됐다. 한국영화계는 영화 자체의 역량보다 할리우드 영화의 밀어붙이기식 스크린 독과점의 결과라고 반발한다.

하지만 이는 한국영화계 스스로 자초한 면이 크다. 지난해 ‘괴물’의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일었을 때 한국영화계의 관점은 애매했다. “대작 영화가 스크린을 과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현상긍정론, “부작용은 있지만 ‘괴물’의 대박 흥행이 전체 산업의 파이를 키우는 역할을 하므로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자”는 현상무마용 의견이 많았다.

한국영화는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는 방법으로 대규모 마케팅과 배급 전략을 썼다. 그에 따라 최근 3, 4년간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가 다른 군소영화를 잡아먹는 식의 먹이사슬이 형성됐다. 극장수익 외의 부가판권시장이 궤멸 직전인 상황에서 영화사들이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에 매달린 것이다. 한 달에 한두 편의 영화만이 시장에서 살아남고 나머지 수십 편은 궤멸한다. ‘괴물’이 흥행할 무렵만 해도 이런 추세에 크게 이의를 다는 분위기가 없었다. 모두가 승자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희생과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는데도 대다수 영화 제작자는 돈 때문에 쩔쩔맨다. 현재 한국 영화산업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제작사가 아니라 극장 체인을 쥐고 있는 대기업이다. 대기업은 제작, 투자, 배급, 상영 등 영화의 전 분야를 지배하는 수직 통합적 권력을 형성했다. 영화 제작의 단계마다 수익을 거둬 간다. 이들은 더 빨리 실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극장 개봉 후 단기간에 가장 많은 이익을 올리는 데 골몰한다. 극장 개봉의 기억이 채 가시기 전에 서둘러 DVD를 출시해 자사가 보유한 케이블 채널에 수시로 공급한다.

철저하게 단기적 이익에 매달려 짜인 이런 스케줄로는 영화 상품의 순환적 자본 축적이 힘들다. 장기적으로는 산업 전체를 갉아먹는 독이 된다. 극장 개봉에서는 그저 그랬지만 다른 부가판권시장 수입으로 일정한 이득을 냈다는 사례를 한국에서 찾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중소 규모의 영화제작사는 웬만큼 흥행한 작품을 내지 않는 한 들어간 비용조차 건지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박 영화에만 매진한다. 스크린 독과점 현상을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태도를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실험을 추구하는 중소형 영화가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야 주류영화의 체질도 건강해진다. 그러나 현재의 시장 상황은 이런 소리를 공염불로 만든다. 멀티플렉스에서 특정 영화가 30% 이상의 스크린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법안도 나왔지만, 영화계의 호응은 미미했다.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영화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뿐이다. 영화인들이 대기업 극장 자본과 적극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극장에서 공정한 경쟁질서가 잡히고, 영화 부가판권 시장이 되살아나야 한다. 이 두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국영화의 침체기 터널은 오랫동안 출구의 빛을 보기 힘들 것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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