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손상익]황무지서 꽃핀 한국만화의 힘

  • 입력 2007년 5월 1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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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땅의 근엄한 어른들은 예나 지금이나 만화를 그저 어린아이들 볼거리로만 여긴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 만화는 나라 안과 밖에서 매우 값진 문화 상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어른들의 가치관에 혼동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

한국 만화가 지금 대중문화 시장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허영만의 ‘타짜’는 영화로 만들어져 한국영화 역대 흥행랭킹 7위의 관중몰이를 했다. 형민우의 인기작 ‘프리스트’는 요즘 한창 세계 최고의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 영화 ‘스파이더맨3’의 감독 샘 레이미의 차기작 리스트에 올라 있다.

최근에 나온 미국의 한 시사 잡지는 “한국 만화가 독특한 정체성을 내세워 일본 만화의 인기를 제치고 미국 내에서 적지 않은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요지의 고무적인 기획기사를 게재했다. 우리 만화는 이제 코흘리개들이 즐기는 심심풀이 수준이 아니다. 세계의 성인들이 열광하는 당당한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이다.

새삼 한국 만화가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여 온 긴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 만화는 한동안 일본 ‘망가’의 아류로 떠돌았다. 서구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만화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만화 문화의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일본이라는 공룡 시장에 종속돼야 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정부 측의 표현의 자유 통제도 한국 만화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린이날을 전후해서는 언제나 ‘불량’ 만화에 대한 관제(官製) 화형식이 열렸다. 최근까지도 이현세나 강철수 같은 한국의 대표 만화가를 비롯해 수많은 만화가가 음란물 생산 및 유포 혐의로 사법 당국의 근엄한 심판에 내몰려야 했다.

만화의 사전 검열이 1997년 이후 사후검열제도로 대체됐지만 아직 당국의 눈총은 따갑기만 하다. 만화를 나쁜 볼거리로만 여기는 사법 당국의 시각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인기 어린이만화 ‘짱구는 못 말려’가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 성인용으로 분류된 기막힌 일도 있었다. 세계의 만화가 저마다 다채로운 표현의 영역을 경쟁적으로 개척하고 있지만, 한국의 만화가들은 아직도 ‘이건 되고 저건 안 돼’라는 암묵(暗默)의 제재에 묶여 있다.

이런 모진 창작 현실을 감안하면 한국의 만화가 지금처럼 당당한 문화적 위상을 확보하게 된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한국의 만화가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치고 뿌리를 내린 힘은 오로지 만화가의 노력과 인내에서 나왔다. 그들의 분투를 표현할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은 이제 만화를 주력 문화상품 가운데 하나로 꼽고 지원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만화가가 “제발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달라”고 절규한다. 한국의 만화가 미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자유를 만끽하는 만화’들과 겨룰 수 있는 길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20세기 한때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미디어가 더는 메시지로만 머물지 않는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니컬러스 네그로폰테 교수는 “미디어는 이제 콘텐츠를 유통시키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만화라는 미디어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수준 역시 그 안의 콘텐츠로 가늠해야 한다.

볼거리와 읽을거리는 21세기 대중문화의 핵심이다. 만화는 이제 당당하게 그 주류 콘텐츠 그룹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척박한 황무지에 겨우 위태위태한 뿌리를 내렸던 우리 만화가 지구촌을 누비는 문화 콘텐츠로 이제 막 예쁜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소담스러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얻으려면 더욱 애정 어린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

손상익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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