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르클레지오-황석영 문학의 역할을 논하다

  • 입력 2007년 3월 1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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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르클레지오(왼쪽)와 소설가 황석영 씨가 9일 서울 종로1가 대산문화재단에서 문학과 작가의 역할에 대해 대담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국적도 개성도 다르지만 비슷한 삶의 궤적을 발견한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프랑스 작가 르클레지오(왼쪽)와 소설가 황석영 씨가 9일 서울 종로1가 대산문화재단에서 문학과 작가의 역할에 대해 대담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국적도 개성도 다르지만 비슷한 삶의 궤적을 발견한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최근 방한한 프랑스 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클레지오(67) 씨와 소설가 황석영(64) 씨가 8일 서울 종로구 종로1가 대산문화재단(교보생명이 설립) 사무실에서 대담을 나눴다. 르클레지오 씨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프랑스의 대표 작가이고 황 씨는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몸으로 겪은 체험을 작품에 적극 옮겨온 작가다. 이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사이다. 네 번째 방한한 르클레지오 씨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황 씨의 소설을 대부분 찾아 읽었고, 황 씨는 청년 시절부터 르클레지오 씨의 소설을 탐독하면서 늘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 1시간 반에 걸친 대담에서 두 작가는 새로운 세기 문학의 운명과 작가의 역할을 논의했다.》

▽르클레지오=한국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왔는데, 올수록 한국은 글쓰기에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파리에서 장기 체류 중인데 잠시 귀국했습니다. 저는 파리에서 글이 더 잘 써지던데요(웃음).

▽르클레지오=당신의 다음 작품이 빨리 번역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설 ‘손님’을 처음 읽었을 때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이 떠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한 사람은 동양에서, 또 한 사람은 서양에서 났다. 한 사람은 남성적인 힘이 두드러지는 문체와 서사 구조가, 한 사람은 시적인 아름다운 문장과 사유적인 전개가 특징이다. 한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 덕분에 ‘황구라’로, 한 사람은 은둔자적 스타일 때문에 ‘도피하는 작가’로 불린다.

▽황=근래 들어 어떻게 하면 현실주의를 보편적으로 다루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최근작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황금물고기’의 경우 서구 사회가 아닌 주변부의 국가들, 제3세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그리고 있지요. 당신의 초기작은 도시 문명에 대한 회의와 비관이 주제였는데 지금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저는 초기작보다 현재의 작업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르클레지오=‘주변부’라고 표현하셨는데, 당신은 그 ‘주변부’ 작가, 그러니까 미국과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가만의 개성적인 문학 세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참여적인 문학작품을 통해 인간 탐구를 하는 인본주의적 작가라고요. 물론 유럽에선 당신의 작품을 보고 ‘지나간 사조의 재현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으나, ‘손님’이나 ‘삼포 가는 길’ 등은 과거와 다른 서정적인 현실주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은밀하고 내면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황=우리의 삶에는 유사성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둘 다 이주자의 자식이고, 청년기에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등 서구 중심 논리의 잔혹함과 비정함을 체험했습니다. 당신이 초기작에서 근작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듯이 저도 그렇습니다. 베트남전과 광주민주화항쟁, 베를린 망명, 교도소 수감을 체험했고 그때마다 작품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행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활력이 끝나가고 새로운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죠. 그 과정에서 세계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저는 상징적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전깃줄 위에 앉아 있던 새떼는 다른 무리가 오면 자리를 내주는 게 아니라, 일제히 떠서 빙빙 돌다가 때가 되면 공간 편성을 해서 다시 내려앉는다. 내 문학이 ‘내려앉는 데’ 관여하고 싶다”고.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가파르던 시대였다. 작가에게 시대는 짊어져야 할 짐이었고 문학은 사회 현실의 첨예한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21세기는 달라졌다. 문학이 설 땅도 좁아졌다.

▽르클레지오=우리 세대는 참여문학의 전통을 세운 사르트르와 카뮈의 후예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참여문학을 하기란 어렵습니다. 참여문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문학이었으며, 새로운 세기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정치인의 역할이라는 게 미국과 유럽 문단의 생각입니다.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 이후 참여문학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참여문학을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저는 한국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국 문학이 소설의 새 경향을 찾아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식민지 시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가 부닥친 전쟁을 겪은 나라입니다. 치열한 역사를 가진 나라의 작가만 쓸 수 있는 독창적인 작품이 세계 문학에 충격을 줄 것입니다.

▽황=최근 디아스포라는 세계적인 화두이지요.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도 있습니다. 한국에선 남북문제도 있습니다. 그 혼돈의 과정에서 밀려난 사람들, 사라지는 것들, 하찮은 것들을 문학이 붙잡고 씨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르클레지오=책에 대한 관심이 줄고 시각 매체의 영향이 커지면서 작가의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오늘날 작가는 사르트르처럼 정치적 의지를 대변하기 어렵습니다. 영향력이 큰 작가라고 해도, 전후부터 1960년대까지 작가가 누렸던 ‘예언자’의 역할은 더는 하지 못하겠지요.

▽황=전 세계가 그럴 겁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선 작가들이 예언자의 역할을 맡을 여지가 아직 있습니다. 남북 대치의 상황, 그로 인해 모든 국내 정세가 안정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한국 작가들은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으며 사회 참여적 역량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르클레지오=한국이 빨리 통일되기를 기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불합리한 국경이 ‘38선’입니다. 38선으로 나뉜 이들이 교류하는 데 한국 작가들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들이 그런 교량 역할을 함으로써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주길 기대합니다. 정치적 의미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프랑스나 미국의 경우 지식인 계층과 ‘갱 영화나 보러 다니는’ 사람들 간의 단절이 심각합니다. 작가의 역할은 책을 읽기 어려운 곳에 책을 보내며, 문화의 혜택을 모르는 사람들을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같은 정치적 투쟁은 아니지만, 작가들은 단절된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이런 싸움 또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 투쟁입니다.

▽황=‘문학의 종언’이라는 말도 있는데, 종언까지는 아니라도 서사가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어려운 듯합니다.

▽르클레지오=젊은이들이 작품을 너무 읽지 않아 고민입니다. 이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목소리나 형태가 문학에 도입되어야 합니다. 젊은 층은 시각 매체에 관심이 많으니 연극과 협력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전에 희곡을 쓰셨죠? 연기력이 있으셔서 직접 출연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웃음).

▽황=제가 광대 기질이 있어요(웃음). 오랫동안 희곡을 쓰지 않았습니다만, 새 소식을 알려드려야겠네요. 프랑스 태양극단의 연출가 아리안 므누슈킨과 함께 작업하기로 했습니다. 시놉시스를 만들고 배우들과 논의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식으로요. 5월쯤 시작할 겁니다. 운주사의 미륵 설화가 줄거리가 될 텐데요. 그러고 보니, 전에 한국에 다녀가셨을 때 ‘운주사, 가을비’란 시를 쓰셨지요? 정말 인연이 깊군요.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눠 기쁩니다.

▽르클레지오= 저도 그렇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르클레지오::

194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모리셔스 섬에서 태어났다. 23세였던 1963년 첫 작품 ‘조서’로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르노도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황금물고기’ ‘우연’ 등 서구적 사유 틀이 아니라 자연과 합일을 강조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며, 아프리카 멕시코 등 제3세계 국가 체류 경험을 통해 변방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소설에 담아 온 작가다.

::황석영::

1943년 만주 신경(新京·현재의 창춘)에서 출생한 그는 8·15광복 후 귀국해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등단 초기엔 탐미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 주었으나 베트남전 참전 이후 사회의식을 체화했고, 광주민주화항쟁을 겪으면서 이데올로기와 사회참여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장길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등의 밀도 높은 소설로 한국 사회를 해부해 왔다.

정리=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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