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이념 뛰어넘은 도산의 리더십 간절… 안창호 선생 69주기

  • 입력 2007년 3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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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 69주기가 되는 날로 흥사단과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 주최로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서 추모행사가 열린다. 이에 맞춰 1929∼1932년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99) 도산안창호혁명사상연구원 이사장이 추모사를 보내왔다.》

최근 미국과 북한의 관계 회복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희망을 던져 주고 있다.

반면 나라 안으로는 근시안적인 민생경제와 주택 정책, 교육 정책 등이 서민에게 많은 고통을 안기고 있다.

서민의 꿈은 작은 주택을 갖고 오순도순 평화롭게 차별 없이 잘살아 보는 것이다. 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정책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이처럼 국가가 어려울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한국의 지도자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80년 전 상하이에 갔을 때 선생을 처음 만났다. 선생은 젊은 나를 반기고 당돌한 불평을 모두 들어 주며 패기를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셨다. 덕분에 선생의 비서가 돼 독립혁명사상을 배울 수 있었다.

오늘날 일부 한국인은 추상적 이념을 나눠 서로 비난하며 갈등을 부추긴다. 친미(親美)다 반미(反美)다, 진보다 보수다 하며 서로 자기주장만 옳다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80년 전 상하이에서 독립혁명을 전개할 때도 비슷한 양태를 봤다. 이때 도산 선생은 미국 교포들이 모금해 준 2만5000달러를 갖고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독립혁명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도산 선생의 헌신적인 운동은 분파주의와 지역주의에 매몰된 사람들의 편견과 방해로 좌절을 겪었다.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독립전쟁과 혁명운동임을 인식해 민족 내부에서 민주사회정책을 펴려 했다.

그래서 도산 선생과 애국지도자들은 지역주의와 분파적 이념주의를 초월한 인사로 비밀조직 대독립당을 구성해 민족의 독립혁명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한국에 돌아옴으로써 대독립당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

10일은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반죽음이 돼 나와 경성대병원에서 순국하신 지 69주년 되는 날이다.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산 선생처럼 진보와 보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모두 포용하는 마음 넓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하는 애국정신을 실천할 때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 ‘잃어버린 옛 나라를 찾아 복스러운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도산 선생의 유훈(遺訓)이 가슴속 깊이 사무친다.

구익균 도산안창호혁명사상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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