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윤영수/가장 깊은 울림 ‘엄마’

  • 입력 2007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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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난히 추웠던 저녁, 루시아 할머니의 영전에 연도(추모기도)를 드리고 와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채로 아기들 방에 들렀다. 생후 11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말문이 안 트인 귀염둥이 석이가 나를 보고 기다렸다는 듯 기어오며 “엄마” 하고 불렀다. 갑자기 엄마라는 단어가 ‘쿵’ 하며 내 마음에 강하게 부딪혀 왔다. 아기 키우는 일을 시작한 지도 어언 9년, 그동안 예사롭게 듣고 넘겼던 아기들의 그 말이 이제야 마음 깊숙이 꽂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속에 메아리치는 ‘엄마’란 말을 수없이 되뇌다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루시아 할머니는 1월 말 98세로 돌아가셨다. 할머니와의 인연은 내가 치매 어르신을 돌봐 드리면서부터다. 그분은 유난히 앞뒤가 잘 맞는 말씀을 하셔서 치매가 아닌 줄로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분의 개성은 식사 후 10분도 안 돼 “배고파 수녀야, 얼른 밥 줘!”라는 말로 드러난다. 그리고 수녀들만 보시면 자신의 딸인 듯 불러 손을 잡으시고는 “성녀가 돼야 해”라며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따님을 수녀원에 보내신 할머니는 자나 깨나 묵주를 쥐고 “우리 수녀가 꼭 성녀가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바치셨다고 한다.

어느 날 할머니가 무슨 이유에선지 흥분해서 간병인과 다툼을 하셨다. 싸움을 말리다 도저히 안 돼 마침내 협박(?)으로 들어갔다. “엄마, 그러면 저 성녀 안 될래요. 어머니께서 그렇게 화내시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 성녀가 안 될 거예요”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금방 “안 된다, 수녀야. 내가 잘못했다. 넌 성녀가 돼야 해” 하시며 자신의 모든 고집을 다 접고 조용해지셨다. 당시에는 단순한 고마움뿐이었는데 그분이 가신 지금, ‘엄마’라는 부름 앞에서 비로소 그때 뭔가를 제대로 깨닫게 됐다.

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 배우는 단어, 가장 마지막까지 귀 기울이게 하는 단어 ‘엄마’.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엄마가/(중략)/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원이 없겠다(중략)/그리고 한 번만이라도/엄마!/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숨겨 놓은 세상사 중/딱 한 가지/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엉엉 울겠다.”

정채봉 님의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을 외며 엄마의 존재에 대한 고귀함을 새롭게 되새겨 본다.

윤영수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녀·성가정입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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