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에서]오규원 시인 수목장 날

  • 입력 2007년 2월 6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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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것을 시라고 생각한다면 저 창문에서 뛰어내려라.”

스승의 수업을 들을 때 제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삐삐가 울리면 2점 감점, 제출한 습작은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채로 돌려받았다.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난 날, 제자들은 “고아가 됐다”며 부둥켜 울었다.

5일 오규원(사진) 시인의 수목장이 치러진 인천 강화군 전등사에는 젊은 문인 80여 명이 모였다. 신경숙 황인숙 함민복 장석남 박형준 천운영 윤성희…. 한국 문단을 이끄는 주역들이자 모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오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소설가 신경숙 씨는 “선생님이 오랫동안 편찮으셨지만 그대로 항상 곁에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승의 뼛가루가 묻힌 소나무 앞에서 양선희 시인은 “저 오늘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미장원도 다녀오고 손톱 손질도 했어요. 예뻐 보여요?”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함민복 시인은 “나무처럼 몸도 마음도 군살이 없으셨는데 나무가 되시네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장석남 시인은 “내가 시 잘 쓰는 청년인 줄 알았는데 오 선생님 수업을 받고 절망해서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며 “졸업하고 1년 뒤 선생님이 부르시더니 격려를 해 주시더라. 그때 큰 힘을 얻었고 이듬해 등단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은 추모사로 자작시를 낭독했다. 고교 때 써 보고 손에서 놓았던 시를, 오랜 문우를 위해 수십 년 만에 다시 쓴 것이다. “자네 앉았던 자리/아직 따스함 남아 있고/똘똘한 자네 목소리/귓가에 맴돌건만,/규원이, 자네는 이제 아무데에도 없고/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네.”

병상에서도 휴대전화 문자로 하루 한 행씩 시를 썼다던 오 시인. 시밖에 몰랐던 시인은 생애 내내 외로웠다. 15년 넘게 폐기종으로 투병해야 했고, 문단의 사대부적 구조와 문학 권력을 비판했던 단호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날 시인의 마지막 길에는 그에게 수도 없이 혼나던 제자들이 기꺼이 함께했다. 그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시구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처럼 시인은 전등사 뒷산 소나무 아래서 잠들었다.

강화에 사는 함 시인이 ‘능참봉’을 맡기로 했다. 위암 투병 중인 김영태 시인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보내왔다. 그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강화=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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