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미완의 시대’

  • 입력 2007년 1월 13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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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에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고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에릭 홉스봄은 어린 시절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재즈에 빠져들었다고 회상한다. 표지 사진 역시 책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모습이다. 사진 제공 민음사
“외모에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고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에릭 홉스봄은 어린 시절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재즈에 빠져들었다고 회상한다. 표지 사진 역시 책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모습이다. 사진 제공 민음사
◇미완의 시대/에릭 홉스봄 지음·이희재 옮김 692쪽·2만5000원·민음사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는 담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 그가 펴낸 자서전의 원제는 ‘Out of Place(제자리를 벗어난)’였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계이지만 영국식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가 조국이라고 가르친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한평생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망명객으로 살았던 이 비범한 문화비평가는 불행한 이방인의 삶을 학문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아마도 진정한 지식인은 관찰자이자 외부자로서 살아야 하는 고독한 숙명을 타고나는가 보다.

에릭 홉스봄 역시 한평생 어디서나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홉스봄은 근대 유럽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길을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 등 4권의 명저로 담아낸 역사가. 올해 아흔 살의 노(老)역사가는 국경의 울타리를 넘어 역사학에서 보편주의를 일관되게 추구해 온 좌파 지성인이다.

그는 영국계 유대인이면서 이집트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스라엘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최고 마르크스학자였지만 그의 저서는 소련에서 판금됐다.

이 불행한 경험은 홉스봄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역사는 격정과 감정, 이념으로부터 거리를 둬야 하며 특히 ‘일체감’이란 유혹을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사에 필요한 것은 자신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라는 얘기다.

“(이방인의 삶은) 개인으로서는 고달팠지만 역사가로서는 각별한 자산이었다”고 회상한 노역사가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가 번역 출간됐다.

그에게 20세기는 ‘흥미로운 시대’다.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그리더니 자서전에선 흥미로운 시대로 봤다. 역설적이다. 어쩌면 어느 세기보다 끔찍한 침략과 전쟁이 벌어진 20세기를 통째로 살아내며 해석해야 했던 자신의 삶을 은유한 것이리라.

노역사가의 회고는 자신이 왜 공산주의자가 됐는지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어린 홉스봄은 베를린에서 나치의 등장을 지켜봤다. 한편에서는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대중시위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집단 황홀경’과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 등이 그를 공산주의로 이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삶을 바쳤던 공산주의 이념은 스탈린주의로 왜곡됐고 20세기가 끝날 무렵 종언을 고한다. ‘공적인’ 역사가 노역사가의 ‘사적인’ 삶과 맞물려 쉼 없이 펼쳐진다. 680여 쪽이나 되는 기나긴 회고 내내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는 노역사가의 시선은 윤색이나 자기연민 없이 놀라울 정도로 정직하고 객관적이다.

무엇보다 이 자서전의 백미는 노역사가가 오늘의 역사학에 던지는 준엄한 경고. 이 경고는 21세기 초 논쟁의 지뢰밭이 된 한국 역사학에도 긴요하다.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과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정되고 날조되는 역사가 늘어난다…오로지 (특정) 집단을 위해서만 씌어진 끼리끼리 역사(일체감의 역사)는 역사로서는 함량 미달이다.” 한국 사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뜨끔한 노역사가의 일갈이다.

막강한 대영제국이 졸지에 사라지고 1000년을 갈 것처럼 보였던 독일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본 노역사가. 그는 자서전의 끝을 이렇게 맺는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관찰자이자 이방인이면서도 역사와 시대에 뛰어들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학자의 거친 숙명임을 웅변하는 듯하다. 그래서 20세기는 그에게 ‘미완의 시대’다. 편집 과정에서 8장 ‘반파시즘과 반전투쟁’부터 11장 ‘냉전’까지의 주석이 빠진 것이 옥에 티. 원제 ‘Interesting Times’(2002년).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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