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집필 끝낸 시오노 나나미

  • 입력 2006년 12월 17일 17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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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한 시오노 나나미. 자료사진 동아일보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한 시오노 나나미. 자료사진 동아일보
"내가 호소하고 싶은 것은 '공생'이다. 먼 옛날 피부색도, 민족도, 종교도 다른 사람들이 공존공생하며 살았던 '로마'라는 제국이 지구상에 있었다고 알리고 싶은 거다."

1992년 이래 1년에 한권씩 15권. '로마인 이야기'(신초사·新潮社)를 완간한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69) 씨가 16일 도쿄(東京)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

그는 "지금은 머리가 텅 빈 상태"라며 "요즘 '로마인 이야기'와 관련해 15년분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년 출판을 위한 작업을 마치고는 책이 나오기 전에 이탈리아로 떠나 그동안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는 것.

그의 말대로 9·11테러 이후 전 세계를 뒤흔든 종교와 문명의 충돌은 2000년 전 로마시대를 달리 보게 한다. 어떻게 로마만이 민족, 문화,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중근동, 북아프리카에까지 이르는 '보편제국'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

"로마인들은 현실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전란의 고통만큼 불행한 것은 없다는 진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 로마인의 통치는 독특한 관용으로 일관됐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은 정복한 이민족의 신까지도 받아들였다. 속주를 우호국으로 삼아 인재를 등용하고 속주 출신 황제까지 배출했다. 여차하면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군단이 출진해 광대한 영토를 지켰다. 이것이 '팍스 로마나'였고 공존공영의 정신에 의한 다민족 운명공동체였다.

이 점에서 그는 로마 '제국'은 적어도 과거 영국의 제국주의나 요즘 미국과도 전혀 다르다고 단언한다. "가령 대영제국은 간디를 요직에 등용하려 하지 않았고 미국도 힘은 강대하지만 로마처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공생 질서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자 암흑의 중세가 찾아왔다. 제15권에서 다룬 서로마제국 멸망과 이후 '지중해 수평선에 이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7세기까지는 로마 문명이 종언을 고하고 일신교, 즉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때다.

"요즘 다시 중세가 시작되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든다. 마치 종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만 존재하는 듯이 보이니까. 로마인들이 실현한 '리얼리즘'의 지혜가 아쉽다. 하지만 나는 책에서 제언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무엇을 얻을 것인가는 독자에게 달렸다."

그의 지도자론에서도 로마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고귀함에는 책임이 따른다)를 읽을 수 있다.

"리더는 조직을 생각하고 자기 배를 채우지 않는 인물이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면 당시 한 개인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로마에는 공공건물의 유적만 있다. 로마인들은 피라미드에 감탄하면서도 '죽은 단 한사람보다는 살아있는 많은 사람을 위해 다른 것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마키아벨리는 역량, 운, 시대와의 부합성을 리더의 3대 요건으로 꼽았다"면서 아무리 뛰어나도 시대에 맞지 않으면 리더가 되기 힘들다고 단정했다.

로마의 흥망성쇠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국가융성의 요인을 그는 기백, 즉 스스로를 보는 긍지에서 찾는다. 가장 나쁜 예는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것. "밖에 적이 있는데 내부 싸움에 빠져 붕괴해버린 아테네, 피렌체 같은 나라들이 그렇다. 작은 문제에 집착하면 큰 것을 놓친다. 일본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대표적인 예가 '좁은 의미의 내셔널리즘'이다."

그는 한일관계도 리얼리즘에 투철할 것을 권했다. 그는 "종교적 열광과 내셔널리즘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타협점을 찾으면 쉽게 풀릴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독도는 '다케시마'와 '독도'라고 각기 부를 정도로 양측의 인식은 확연히 다르다. 억지로 어느 한쪽이 옳다고 결론 내리지 말고 각자 관점에서 책을 만들고 바꿔 읽으며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정치의 관계도 거론했다. "한국의 대통령이건, 일본의 총리건 정치가는 정치를 하면 되지 역사를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친구가 되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지만 난 (아베 총리처럼) 너무 진지하고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과 사귀는 데는 영 서툴다"고 했다. 반면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는 친구로서 조언하는 사이였다.

'로마인 이야기'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애독하는 정치인이나 재계인사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 내 단행본 문고 누계부수는 774만부. 한국에도 번역출간(한길사)돼 200여만 부가 팔렸다. 영역(英譯)도 추진되고 있다.

그는 15년간 여름방학도 없이 고문서부터 현대의 연구 성과까지를 정독하고 북아프리카부터 스코틀랜드, 옛 영토의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약 2만1000매의 원고를 쓰면서 버린 만년필만 5자루.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15년간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고백. "건강검진을 했다가 뭐라도 나오면 일이 중단된다. 물론 독자들은 기다려줬겠지만 나로서는 한번 중단한 뒤 다시 시작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거다. 지금 병원에 가면 큰 병이 발견돼 곧 죽을지도 모른다(웃음)."

시오노 나나미는 누구

1937년 도쿄(東京)에서 태어난 시오노 나나미 씨는 고교 시절 호머의 일리어드에 심취해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할 정도로 '별난 소녀'였다.

가쿠슈인(學習院) 대 철학과 시절에는 학생운동에도 참여했으나 마키아벨리를 알게 된 뒤 회의를 느꼈다. 196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서양문명의 모태인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현장을 찾아다니며 '놀면서' 공부했다.

데뷔작은 1968년 일본에 귀국해 주오구론(中央公論)사에서 발표한 '르네상스의 여인들'. 그러나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은 1970년의 첫 장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인 체사레 보르자의 일대기를 그린 이 책으로 마이니치(每日)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이 해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이탈리아 의사와 결혼해 피렌체에 정착했다. 이후 독학으로 이탈리아 역사를 공부하며 다양한 저서를 쏟아냈다.

그에게 '로마인 이야기'는 준비에만 20년, 집필에 다시 15년이 걸린 평생의 작업. 1992년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매년 1권씩 발표해 15권으로 완성하겠다고 독자들에게 약속했다.

'로마인이야기'는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운 때부터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에 이르는 시기를 1~5권 '융성기', 6~10권 '안정기', 11~15권 '쇠퇴에서 멸망'의 세 단계로 구성했다.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바탕을 두되 사료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은 상상력으로 보충하지만 허구에 빠지지 않는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은 "서사는 좋아하지만 해설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의 성격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1937년 도쿄 출생

1963년 가쿠슈인(學習院) 대 철학과 졸업

1963~1968년 이탈리아 유학

1968년 집필활동 시작, '르네상스의 여인들' 발표

1970년 첫 장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으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수상

이탈리아 거주 시작.

1982년 '바다도시 이야기'로 산토리 학예상

1992년 '로마인 이야기' 제 1권 출간

2002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 수여

도쿄=서영아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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