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기억의 일곱가지 죄악

  • 입력 2006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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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은 기억상실과 싸우기 위해 온몸에 기록을 남기지만 자신의 추악한 기억을 교묘하게 뒤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도 뇌에서 재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망각 못지않게 왜곡이 이뤄진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은 기억상실과 싸우기 위해 온몸에 기록을 남기지만 자신의 추악한 기억을 교묘하게 뒤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도 뇌에서 재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망각 못지않게 왜곡이 이뤄진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대니얼 L 샥터 지음·박미자 옮김/373쪽·1만5000원·한승

기억에 죄를 묻는다면 그 죄명은 무엇일까. 가장 큰 죄명은 망각일 것이다. 기억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진전시켜 보면 기억의 왜곡도 큰 죄다.

단기기억상실증 환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메멘토’를 보자. 주인공은 10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죄’만 저지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을 교묘히 조작해 악한 자신을 선한 존재로 포장한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망각과 왜곡 등 인간의 기억이 갖는 문제를 성경의 일곱 가지 대죄에 비유해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그가 명명한 기억의 7대 대죄는 소멸, 정신없음, 막힘, 오귀인(誤歸認),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이다.

소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이 흐려지거나 손실되는 가장 익숙한 현상이다. 우리는 최초 학습한 내용의 과반수를 대략 하루만 지나도 잊어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이런 급속한 망각률은 둔화된다.

정신없음은 주의와 기억 간의 접촉에 이상이 생긴 경우를 말한다. 우리가 주의력을 다른 곳에 집중하다 보면 당연히 기억할 것을 깜빡하는 경우가 생긴다. 1999년 전미 기억대회 우승자가 일상에서는 형편없는 기억력으로 포스트잇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막힘은 저자가 세계에서 가장 시적으로 표현됐다고 꼽은 한국어 표현 ‘혀끝에서 맴돌다’에 기막히게 표현돼 있다. 누군가의 이름과 지명을 떠올리려 할 때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개념적 표상과 어휘적 표상을 일치시키는 뇌 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오귀인은 기억의 번지수를 잘못 찾는 것을 말한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게 실제 기억이 아니라 환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피암시성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의 유도신문에 없던 기억을 만들어 내는 목격자들을 떠올리면 된다.

편향은 현재의 믿음이나 관점에서 과거의 기억을 덧칠하는 경우다. 지속성은 망각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경우다. 지워 버리고 싶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일곱 가지 죄라고 표현했지만 마지막 장에서는 결국 ‘대사면령’을 내려 준다. “그것은 인간 진화의 부산물이며 우리 뇌의 기능이 제대로 실현되고 처리되기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이기 때문이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빌 클린턴의 청문회 증언 등 풍부한 사례를 분석해 가며 기억의 실체를 파고드는 저자의 필력도 돋보인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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