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천광암]한일 문화 상생 이런 걸까…

  • 입력 2006년 5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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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유출된 조선시대 고서 5만 권의 목록을 집대성한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65) 도야마(富山)대 교수의 연구실은 ‘책 창고’에 가까웠다.

한 사람이 옆걸음으로 간신히 걸어다닐 만한 통로를 빼고는 모든 공간을 책과 자료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가 구석에서 접이의자를 꺼내 앉으라고 권했지만 통로까지 삐져나온 책 때문에 의자를 완전히 펴기도 어려웠다.

제자들이 쓰는 교실 겸 공동연구실도 책상과 의자를 놓은 자리를 빼고 나면 형편이 비슷했다.

교실 뒤편 가로 약 5m, 높이 2m 크기의 철제 책장에는 두툼한 종이 파일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가 100여 곳의 도서관과 서고를 뒤져 정리한 고서 5만 권에 대한 서지 메모와 복사물들이다.

종이 파일을 펼치자 후지모토 교수가 일일이 손으로 쓴 글씨가 B4용지마다 깨알같이 적혀 있다.

1만 권에 대한 메모만을 추려 첫 번째 책을 펴내는 데만도 8년이 걸린 이유를 쉽게 짐작하게 해 주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의 초인적인 끈기에 대한 경탄과 함께 마땅히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외국인이 대신해준 데 대한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하지만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서지 메모가 이 정도라면 고서 5만 권의 분량은 얼마나 많고, 일본문화 속에서의 비중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5만 권 가운데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약탈본도 있지만 조선이 문물 전수를 위해 호의로 건네준 책이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행히 이 고서들은 한국에 있는 책들보다 보관상태도 훨씬 좋다고 한다.

후지모토 교수는 “일본에서는 조선의 책을 이 사람 저 사람 읽으면서 공부를 하기보다는 문화재로 간직하는 데 역점을 뒀기 때문에 파손이나 낙장도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조선이 전해준 고서 덕분에 풍요로운 정신문화를 누릴 수 있었고 우리는 소중한 문화재를 하나라도 더 양호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후지모토 교수는 35년 동안 먼지 쌓인 서고를 뒤지고 뒤져 ‘문화는 이처럼 상생(相生)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확인했다.

국교를 정상화한 지 40년이 넘도록 한쪽이 이기면 한쪽은 지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거듭하고 있는 한일 정치가 배워야 할 지혜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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