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거짓말?…“거짓말 대상 1위는 직장 상사”

  • 입력 2006년 3월 30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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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면 ‘거짓말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해찬 전 총리의 부적절한 골프나 황우석 전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을 둘러싼 논란에서 관련자들의 말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다. 최근 논란이 된 이명박 서울시장의 남산테니스장 독점 사용이나 금융브로커 김재록 씨 사건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말의 행진’은 또 얼마나 계속될까.

‘크고 무겁고 어두운’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일상에서 ‘작고 가벼운’ 거짓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이 중에는 상대의 처지를 배려한 선의의 거짓말도 있을 것이다. 거짓말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거북하지만, 거짓말이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4월 1일은 만우절. 16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만우절은 가벼운 거짓말을 주고받으며 일상의 긴장을 풀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크고 작은 거짓말이 범람하는 요즘, “이날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말자”는 소리도 나온다.

그러면 직장인들은 얼마나 생활 속 거짓말에 익숙해져 있을까.

동아일보 위크엔드팀은 서울보증보험 LG전자 SK에서 일하는 20∼40대 100명(남 60, 여 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이를 알아봤다. 설문 항목은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거짓말을 잘할 것 같은 집단’ 등 10개였다. 설문 문항과 구성은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발달심리학)의 도움을 받았다.

○ 직장 상사에게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해

응답자들은 ‘업무관계’(32.4%) 및 ‘대인관계’(31.4%)와 관련해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두 응답률의 차이는 1%포인트밖에 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거짓말을 많이 하는 주제는 ‘애정문제’(17.5%) ‘금전문제’(13.5%) ‘기타’(5.2%) 순이었다. ‘표1’ 조사 결과에서 남녀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거짓말의 대상으로는 ‘직장 상사’(37.9%)가 첫손에 꼽혔다. 이어 ‘배우자나 연인’(26.3%) ‘친구나 동료’(23.1%) ‘부모님’(11.6%) ‘자식’(1.1%)이 뒤를 이었다(표2).

곽 교수는 “소규모 설문 조사의 한계가 있지만 거짓말 주제와 대상의 1위로 각각 업무관계와 직장 상사를 꼽은 것은 회사 일로 상사에게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설문에는 친구나 동료(41.8%)가 1위를 차지했다. 직장 상사(28.6%)는 2위를 기록해 직장인들은 직장 상사에게 거짓말을 많이 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많이 속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구나 동료와 직장 상사 다음으로는 배우자나 연인(21.4%) 자식(5.1%) 부모(3.1%)의 순으로 자신을 많이 속이고 있다고 응답했다(표3).

곽 교수는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친구나 동료에 입사 동기나 비슷한 나이와 경력의 선후배도 포함시켰을 것”이라며 “회사 내에서의 거짓말이 일상화된 듯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타인의 거짓말을 안다면서 자신도 거짓말

거짓말을 할 때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대상으로는 부모(47.9%)와 ‘배우자나 연인’(32.3%)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 반해 친구나 동료(9.4%)와 직장상사(2.1%)를 선택한 비율은 크게 낮았다. 직장에서 거짓말을 많이 하지만, 문제 의식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직장에서 거짓말을 덮어 주는 분위기가 있거나 거짓말을 감시하는 장치가 거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직장에서 거짓말에 대해 무거운 징벌을 내리거나 거짓말을 감시하는 장치가 있다면 거짓말을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문 조사에서도 거짓말을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높게 나타난 것은 거짓말에 대한 감시 장치가 거의 없다는 점을 말해 준다.

응답자들은 얼마나 거짓말을 잘할 수 있느냐는 설문에 ‘어느 정도 들키지 않고 속일 수 있다’(50%)와 ‘들키지 않고 매우 잘 속일 수 있다’(8%)라고 답했다. 이는 ‘거의 들키게 될 것이다’(39%)와 ‘반드시 들키게 될 것이다’(3%)보다 크게 많은 응답률을 보였다.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얼마나 잘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61%), ‘매우 잘 알 수 있다’(2%)로 나타나 ‘거의 알지 못한다’(33%)와 ‘전혀 알지 못한다’(4%)를 크게 앞섰다.

결국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잘 알 수 있는데도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에 대한 능숙함을 나타내는 한편 직장 내 거짓말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운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연세대 황상민 발달심리학 교수는 “서구인들은 거짓말을 자질 문제로 보는 데 반해 한국인들은 상황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짙다”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한편 그런 거짓말을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작은 거짓말에는 관대한 분위기

과정보다 성과에 집착하는 업적주의, 과도한 경쟁 분위기도 직장 내 거짓말을 낳는 요인 중 하나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인사조직실의 류지성 수석연구원은 “외국 기업은 업무 중간 과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상사들이 직접 챙겨 작은 거짓말도 하기 어렵지만 한국 기업은 결과에만 집착해 중간보고 등은 쉽게 허위로 할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직원 평가도 외국 기업들은 업무의 전과정에서 직원이 보인 기여도를 반영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중간에 허위 보고를 해도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는 사고방식이 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인성개발 회사인 한국인성컨설팅의 노주선 대표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 1위로 친구나 동료가 뽑힌 것은 경쟁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라며 “예전에는 상사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은 동료와의 관계로 상담을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인사조직그룹의 노용진 부연구위원은 “외국 기업들은 윤리규범위원회 등을 통해 업무상 거짓말을 체계적으로 찾아내 예외를 두지 않고 처벌한다”며 “한국 기업들은 당장 큰 문제가 되는 거짓말만 신경을 쓰고 당사자 처벌에는 ‘정’을 앞세우는 소극적인 태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들은 업무상 거짓말을 신고하는 데 적극적이지만 한국인들은 아직도 이를 비겁하게 생각하는 경향도 강하다”고 덧붙였다.

○ 정치인 연예인이 거짓말 집단 1, 2위

거짓말을 가장 잘할 것 같은 집단은 최고 3개까지 선택하도록 했는데 ‘정치인’(34.6%)과 ‘연예인’(25%)의 비율이 높아 이들에 대한 ‘불신지수’를 보여 줬다. 두 그룹의 합은 59.6%로 절반을 넘었다(표4).

그 다음으로는 ‘기업인’(14%) ‘종교인’(9.9%) ‘공무원’(8.8%) ‘법조인’(3.7%) 순이었으며, ‘의료인’(1.8%) ‘과학기술인’(1.1%) ‘교육인’(1.1%)은 매우 낮게 나왔다. ‘스포츠인’은 한번도 꼽히지 않았다.

정치인과 연예인이 다른 집단에 비해 크게 높은 이유는 이들의 거짓말이 미디어의 초점이 되기 때문. 이들의 직업은 대중에게 가장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어서 ‘말 많은 자의 자기 함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관심사가 지나치게 한정돼 있어 정치인과 연예인이 기업인 등 다른 집단에 비해 높게 나왔다는 분석도 나왔다. 명지대 김정운 문화심리학 교수는 “관심사가 다양한 사회에서 이런 조사를 했다면 한두 개의 집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우석 전 교수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인에 대한 신뢰가 높게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곽 교수는 “한국 사회의 과학기술인에 대한 긍정적인 의식이 부정적인 의식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밝혔다.

스포츠인이 한번도 뽑히지 않은 것은 ‘주무대’인 경기 과정에 거짓말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글=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그래픽=이진선 기자 geranum@donga.com

■김진숙 검사의 거짓말 구별 노하우

검사들의 일은 거짓말과의 전쟁이다.

한사코 범죄를 감추려고 하는 피의자의 거짓말을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서류나 폐쇄회로(CC)TV, 지문 등 물적 증거가 있으면 피의자도 쉽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물적 증거가 없는 수사에서는 피의자의 태도나 반응을 통해 거짓말을 구별해야 한다.

검사들이 거짓말을 하는 피의자의 특징으로 가장 많이 꼽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태도’이다. 대검찰청 김진숙(부부장검사·사진) 홍보팀장은 “눈을 피하거나 몸의 특정 부위를 지속적으로 만지는 게 부자연스러운 태도의 사례”라며 “지나치게 당당하거나 불안해 보이는 목소리와 표정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조사 중 물을 많이 마시는 사람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김 팀장은 “한 공무원의 부인이 부하 공무원들의 부인에게서 승진 사례비를 받은 사건을 조사했는데 거짓말을 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수사 과정에서 물을 많이 마셨다”고 말했다. 특히 사례비 받은 것을 인정한 부인과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는 남편 간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했다고 한다.

순순히 사실을 시인한 부인은 조사를 받으며 물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부인이 혼자 한 일이라며 끝까지 자신의 개입을 부정했고 물증이 없어 구속되지 않았다. 남편은 조사 도중 물을 엄청 많이 마셨다고 한다.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도 부인을 원망하는 것 같지 않다”는 수사관의 말에는 표정이 확 달라지기도 했다.

수사가 어려울 때는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거짓말 탐지기의 결과는 법정에서 증거 능력은 없으나 피의자의 맥박과 심장 박동이 어떤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그래프로 보여 줘 수사 참고 자료로 유용하다.

김 팀장은 지방 근무 시절 친구에게서 2000만 원을 빌린 피의자가 친구가 갑자기 죽자 돈을 갚았다고 가족을 속인 사건을 수사하며 양측의 말이 너무 달라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한 적이 있다.

그는 “피의자가 돈을 갚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라고 내세운 증인에 대해 대답할 때 유달리 맥박과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보고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추궁해 자백을 받았다”고 말했다.

검사들은 수사와 피해자의 보호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한 피해자 여성을 조사하던 한 검사는 검찰의 전화에 불안을 느낀 남편이 사정을 캐묻자 ‘동네 아주머니들 간에 곗돈 문제가 있어 참고인으로 불렀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해줬다고 한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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