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강규형]정명훈, 그가 있기에 행복하다

  • 입력 2006년 3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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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970년대까지도 참 못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낮은 경제력에 비해 높은 수준의 문화적 저력이 있었고 그 좋은 예가 음악분야였다. 훌륭한 음악가들이 끊임없이 배출됐으니 피아노에는 한동일이, 바이올린에는 김영욱과 강동석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 음악계에서 슈퍼스타급으로 인정받은 음악가는 뭐니 뭐니 해도 정경화였다. 1967년 그의 미국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은 한국인으로서 첫 유명 국제 음악 콩쿠르 우승이었다. 비록 석연치 않은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핀커스 주커먼과 공동우승이 주어졌지만 진정한 승자는 그였다.

22세이던 1970년에는 데카사에서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시벨리우스와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녹음 발매했다. 이것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메이저 음반사와의 녹음이었고 평단의 격찬을 받았다. 이 음반은 이후 다른 한국인 음악가들이 메이저 음반사와 녹음하는 길을 열어 준 계기가 됐으며 아직도 명반으로 대우받고 있다.

며칠 전인 18, 19일 바로 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10년 만의 내한 공연을 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00여 년 전통의 교향악단으로 세계 음악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명문이다. 그런데 이 악단의 영국과 아시아 투어를 이끈 지휘자는 다름 아닌 정경화의 동생 정명훈이다. 그는 이미 1996년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도 치러냈다.

정명훈, 그는 누구인가? 그는 21세이던 1974년 권위 있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주최국인 구소련의 안드레이 가브릴로프에 이어 당당히 2위를 차지했다. 현악에서는 정경화 이후 김지연, 장영주, 장한나, 다니엘 리, 양성원 등 세계 정상급 한국인 또는 한국계 연주자들이 계속 나왔지만 피아노와 성악에서는 신체적인 조건 탓인지 훌륭한 음악가가 나오기가 힘들었다. 최근 연광철, 조수미, 홍혜경과 같은 수준급의 성악가가 나오고 있고 진정한 거장으로 성장한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있지만 정 씨의 입상은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독주자와 반주자로서, 그리고 자매들과 결성한 정트리오에서 계속 피아노를 치긴 했지만 주 전공을 지휘로 바꿨다. 1978년 25세의 나이에 대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작년에 91세로 사망)의 부지휘자로 발탁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정명훈은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가게 된다.

필자가 음악분야 수업을 진행하면서 가끔 받는 질문이 있다.

“지휘자는 그저 박자만 맞추는 역할만 하지요?” “정말로 지휘자에 따라 같은 오케스트라도 연주가 달라지나요?” 이런 질문에 나는 “같은 오케스트라라도 지휘자에 따라 천차만별의 연주를 할 수 있으며, 지휘야말로 한국인이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기에 가장 힘든 음악분야”라는 대답을 한다. 훌륭한 지휘자는 ‘마에스트로(maestro)’라 불리며 전 악단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힘든 분야에서 정상의 지휘자로 성장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서울에 온 정명훈을 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구자범 등 젊은 지휘자들이 세계무대에서 밝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지만 아직 정명훈과 같은 거장급 지휘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필자가 본 공연에서 정명훈은 중국이 자랑하는 쇼팽 콩쿠르 우승자이자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윤디 리(李雲迪·리윈디)와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을 아름답게 연주했다. 메인 레퍼토리는 최근 들어 부쩍 많이 연주되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이었다. 작년 6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때 고 박성용 금호그룹 회장의 추모연주로도 이 교향곡의 4악장 아다지에토가 연주됐는데 정명훈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더 훌륭하게 이 난곡을 연주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도 가끔 연주가 마음에 든다는 듯한 미소를 환하게 짓기도 하면서 이 대곡을 지휘했는데, 특히 꿈같이 평안한 4악장이 끝나고 나서 5악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정적은 지구상의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을 줬다. 이 공연 이후에도 이달 30일 인기 절정의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첫 내한 공연에서 피아노 반주까지 한다니 기대가 크다.

한국의 음악 팬들은 정경화가 있어 자랑스러웠고, 정명훈이 있기에 행복하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서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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