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新미술견문기]故 이대원 화백을 추억함

  • 입력 2005년 11월 3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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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대원 화백의 대표작 ‘농원’.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고 이대원 화백의 대표작 ‘농원’. 동아일보 자료 사진
모든 사람은 죽기 마련이고, 죽음은 사람을 철학자로 만든다. 얼마 전 날아든 이대원 화백의 부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올 6월 첫 만남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문득 그때 노화백에게서 느꼈던 짙은 허무는 몇 달 뒤 당신의 운명을 암시한 것이었나.

5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들어섰을 때,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낮이었다. 여든넷 노인의 얼굴은 수척했고 바싹 마른 몸피는 어린아이 것처럼 야위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국화단의 신사’라는 닉네임에 기대했던 예의나 다정다감함은 없었다. 어떤 질문은 “유치하다”고 면박을 주었다. 좀 당혹스러웠다. 기자라는 ‘제도’와 만나면서 긴장하지 않는 노장의 달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짜증과 권태가 묻어나오는 얼굴은 평소 그에게 따라다니는 ‘가장 행복한 화가’라는 수식어를 무색하게 했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였으며 팔순 넘은 나이에도 그림값 비싸기로 유명한 인기 작가였다. 의사 아내와 회혼식(결혼 60주년)을 치른 게 얼마 전이었고 슬하에 훌륭하게 자란 다섯 딸이 있다.

하지만 성취가 클수록 공허함도 큰 것일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그에게도 몸과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 노년의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음을 그는 생면부지 기자와의 첫 만남에서 솔직하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그처럼 비록 그때 그의 내면은 적막하였을지라도 그가 평생 그린 작품들은 밝고 따뜻했다. 당신이 살았던 삶 그대로 그는 삶의 축복에 주목한 ‘양지(陽地)의 화가’였다. 그의 팬들은 캔버스가 전해주는 그의 ‘해피 바이러스’에 즐거워했다.

르누아르(1841∼1919)도 그랬다. 따뜻하고 밝은 색채의 바다로 물결친 그의 작품들은 ‘그림은 위대한 동시에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예술은 엄숙해야 하고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뒤집으며 ‘예쁜 그림은 2류’라고 치부되기 십상인 엄숙한 화단에 반기를 들었다. 르누아르도 갔고 이 화백도 이제 없다. 하지만 그들의 유쾌하고 따뜻한 그림들은 산 자들의 지친 영혼을 오래 치유할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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