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현장에서 열린 문화재 발굴조사 설명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진동 유적지는 무덤의 규모나 다양성 측면에서 청동기시대의 모든 묘제가 모인 종합전시장 같다”면서 “한반도에서 국가가 출현했던 기원전 3∼1세기 이전에 권력자와 위계화된 계층사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평가했다.
이 유적지는 자연제방을 따라 약 400m에 걸쳐 8개의 묘군(A∼H군)이 고인돌 띠를 형성하고 있으며, A군에서만 지름 20m에 이르는 대형 고인돌 12기가 발굴됐다.
대형 고인돌의 경우, 아랫부분에는 잔 자갈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길이 130cm 폭 105cm의 매장주체부(시신이 놓인 곳)가 있다. 주변에는 폭 4m의 도랑(주구·周溝)과 무덤을 흙으로 덮은 봉토(封土)의 흔적,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무덤 위로 돌을 쌓은 즙석(葺石) 등이 갖춰져 있다. 묘 내부에서는 돌칼과 돌화살촉이 출토됐고 주구에서는 붉은간토기(단도마연토기)와 민무늬토기(무문토기) 파편들이 나왔다.
봉토와 도랑, 자갈층을 이용한 이 같은 무덤구조는 중국 신석기 말의 우하량(牛河梁) 유적과 유사하고 일본 야요이(彌生) 문화와의 연관성까지 추적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했다. 전문가들은 “이 유적은 한반도 해양문화의 거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자연제방 위쪽에 집중 배치된 고인돌군과는 달리 제방 기슭에 낮은 계층의 것으로 보이는 석관묘가 2∼5기씩 군집을 이뤄 조성돼 있다. 석관묘 일부에서는 인골도 출토됐다. 이 중 하나는 6∼12세의 어린이로 추정되는데, 두개골과 대퇴골의 거리가 30cm가 채 되지 않아 굴장(시신을 굽혀 매장)을 했거나 두 차례에 걸쳐 매장하는 세골장(洗骨葬)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가야의 수혈식 석실과 신라의 소형 석곽묘 등 후대의 묘제가 모두 나오고 있어 문화의 연속성을 찾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며 “상고사를 새롭게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임효택(동의대) 이청규(영남대) 교수 등은 “국가 출현 전 발달한 군장(君長)사회의 단계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산=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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