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데이트]‘꽃들은 어디로 갔나’ 발표한 소설가 서영은

  • 입력 2004년 9월 3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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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투영한 신작 중편을 선보인 중견소설가 서영은씨. 평생 삶과 문학 속에서 ‘사랑’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살아 온 그는 “진정한 사랑은 나를 내려 놓아 주변과 타인을 채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주기자
자신의 삶을 투영한 신작 중편을 선보인 중견소설가 서영은씨. 평생 삶과 문학 속에서 ‘사랑’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살아 온 그는 “진정한 사랑은 나를 내려 놓아 주변과 타인을 채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주기자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이다. 이별도, 이혼도 흔하다. 온통 사랑 상품들로 치장되어 있는 문화현실 속에서 낭만적 사랑은 의심되고 부정된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기엔 증오와 분노가 너무 많다. 지금, 이 시간과 장소를 ‘사랑’으로 끌어안는 방법은 없을까.

중견소설가 서영은씨(61)가 계간 ‘작가세계’ 가을호에 발표한 신작 중편 ‘꽃들은 어디로 갔나’가 유난히 눈에 띈 것은 이런 목마름 때문인지도 모른다. ‘꽃들은…’은 전처가 죽자 연인을 아내로 맞은 노인과 연인에서 아내로 역할을 바꾼 여인의 이야기다.

두 사람의 열정은 결혼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생활 속으로 녹아들면서 오히려 건조해진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가 결국 욕심 많고 인색하고 사랑과 자신을 철저히 소유하려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으면서 당혹스러워한다. 어느 모로 보나, 작가 자신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글이다.

작가는 스물네 살 때(1967년) 문단의 거목 김동리를 만나 87년 결혼했다. 90년 김동리가 뇌중풍으로 쓰러진 뒤 95년 사별했다. 그 기나긴 열정과 투쟁, 고통, 환희, 격정을 거치고 이제 서영은은 비로소 김동리를 뛰어넘은 것일까. 마침내 그녀가 도달한 ‘사랑법’은 무엇일까. 서울 종로구 평창동 그의 집 근처 찻집에서 작가를 만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물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열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면 안 된다. 열정은 욕망이고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이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다 내려놓아 넘쳐서 주변을, 자기가 아닌 타인을 채우는 것이다.”

―당신의 사랑도 욕망이었나.

“그렇다. 다만 ‘사랑’이라는 화두를 끌어안고 변주를 하다 보니 지금에 이른 거다. 옛날에는 한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나를 더 내려놓고 타인 속에서 죽어야 한다. 내게 사랑은 깨달음의 과정, 구도의 과정이었다.”

―어떻든 사랑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그게 아니라면, 사랑 자체가 무의미한 것 아닌가.

“사랑을 내가 만든 동사로 바꾸면 ‘치러내고 살아내야 한다’이다. 받아들이는 거다. 그러면 충만해지고 차고 넘친다. 사람들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난 이러니까 넌 이래야 한다’고 한다. 거기서 충돌과 상처가 생긴다. 충돌과 상처는 ‘나’라는 에고에 빠졌기 때문이다.”

―에고란 무엇인가.

“내가 어떠어떠하다는 ‘틀’이다. 삶은 물처럼 흐르는 거다. 에고는 흐르는 물 위에 프레임을 찍으려 하는 거다. 이건 왜곡이고 오해다.”

―당신의 작품에선 주로 여성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것은 불평등한 것 아닌가.

“애초에 여성, 남성이라는 경계도 모호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사랑을 더 잘 할 수 있다. 받아내고 키워내고 치러내고 살아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내 것을 못 챙긴다’고 하는데, 그 상태에선 투쟁과 상처밖에 안 남는다. ‘내 것’ ‘네 것’이라는 칸막이를 치우고 ‘공유’라고 생각하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지난해 환갑을 치르셨다. 나이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늙는다는 것은 인생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일이며,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삶에 자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태도다.”

―행복한가.

“큰 매듭을 푼 것 같다. 이제 만사형통이다(웃음). 자의식이 없어지니 그저 세상 속에 젖어 산다. 삶은 살수록 재미나다. 사랑 하나 완성하기에도 생은 벅차다.”

그의 눈빛은 맑았다. 그리고 자주 소리 내어 ‘깔깔’ 웃었다. 그 낯빛이 무구하고 낙천적이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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