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이 간절함, 이중섭은 알았을까…

  • 입력 2004년 7월 20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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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이중섭이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줄도 모르고 남편의 안부를 애절하게 묻는 일본인 아내 야마모도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의 편지들. 겉봉투에 ‘이중섭’이라는 이름이 선명하다.-허문명기자
남편 이중섭이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줄도 모르고 남편의 안부를 애절하게 묻는 일본인 아내 야마모도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의 편지들. 겉봉투에 ‘이중섭’이라는 이름이 선명하다.-허문명기자
《1955년 5월 10일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지금까지와 같이 위대한 인내력으로 당신으로부터의 길보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꼭, 꼭, 꼭 좋은 일이라도, 나쁜 일이라도 소식을 전해 주세요, 마음으로부터 당신의 남덕.》

살아서는 궁핍했으나 죽어서는 신화가 된 화가 이중섭(1916∼1956). 마흔 나이로 요절한 그의 극적인 삶에서 유일한 위안은 일본인 아내 이남덕 여사(84·현재 일본 도쿄 거주)였다.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식민지 청년과 사랑에 빠져 혈혈단신 대한해협을 건너왔고 결혼 후 이름까지 바꿨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그는 일본 도쿄문화학원 회화과 선배인 이중섭을 만난 이후 그의 예술세계에 직접적 원동력이 돼 주었다.

6·25전쟁 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이 여사가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만나자’며 아들들을 데리고 1952년 일본의 친정으로 떠나면서 두 사람은 이별한다. 이때부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재회를 기약하는 편지들이 오갔다.

당시 남편의 안부를 걱정하는 애타는 마음을 담은 이 여사의 편지 세 통이 최근 공개돼 눈길을 끈다. 가나아트센터측은 미농지 8장에 만년필로 촘촘히 세로로 써 내려간 편지들을 한 소장가에게서 구입했다. 가나측은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에 이 편지들을 기증하겠다”고 20일 밝혔다.

화가 이중섭이 아내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는 고 박재삼 시인이 번역해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으로 묶여져 나왔으나 이 여사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는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사흘에 한 번꼴로 오던 남편의 편지가 뚝 끊기자 아내가 이를 걱정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1945년 5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열린 화가 이중섭과 일본인 아내 이남덕의 결혼식. 이중섭은 아내가 일본인이었음에도 조선식 혼례복을 고집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세 통의 편지들은 이 화백이 숨을 거두기 꼭 1년 전인 1955년에 쓰였다. 두 통은 남편 이 화백 앞으로 보낸 것이고, 나머지 한 통은 최근 작고한 구상 시인이 수신인이다.

4월 24일과 5월 10일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의 심정이 절절히 드러나 있다. “어떤 세세한 일이라도 좋으니 당신에 대한 일을 알고 싶은 것이 부인으로서의 심정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써 주세요.”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지금까지와 같이 위대한 인내력으로 당신으로부터의 길보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꼭, 꼭, 꼭 좋은 일이라도, 나쁜 일이라도 소식을 전해 주세요. 마음으로부터 당신의 남덕.”

그래도 남편에게서 소식이 없자 이 여사는 남편과 절친한 교분을 나눴던 구상 시인에게 6월 22일 편지를 쓴다.

“제 편지를 (남편이) 받고 계신지 아닌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상태라 불안합니다. 생활력이 왕성하여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분이라면 이렇게 걱정하지 않을 텐데 님(구상 시인을 가리킴)도 아시다시피 그런 성격이고, 신경도 둔한 분이라 하루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당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황달 신경쇠약까지 겹쳐 성가병원 수도육군병원 성베드로병원 등을 전전하고 있어 편지가 전달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 9월 6일 오전 1시40분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홀로 숨을 거둔 이 화백의 시신은 3일간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시체실에 방치되었을 정도였다.

현재 이중섭미술관에는 이 화백의 원화 9점 외에 그가 아내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찍은 사진만이 소장돼 있을 뿐이어서 이번 서간문 기증은 뜻 깊은 일로 평가되고 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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