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년前 청계천공사 어떻게 했나

  • 입력 2004년 6월 14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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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수문 위에서 준천 공역을 관람하는 모습을 그린 ‘수문상친림관역도’. ‘준천계첩’에는 이 그림을 포함해 당시 공사 진행 상황을 표현한 그림 4장이 실려 있다.-사진제공 열화당
영조가 수문 위에서 준천 공역을 관람하는 모습을 그린 ‘수문상친림관역도’. ‘준천계첩’에는 이 그림을 포함해 당시 공사 진행 상황을 표현한 그림 4장이 실려 있다.-사진제공 열화당
청계천 복원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240여 년 전의 청계천 공사기록인 ‘준천계첩(濬川(결,계)帖)’이 ‘청계천을 가꾸다’(열화당)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이해철 세종대왕기념관 관장(70)이 번역하고 해설을 단 이 책에는 당시 공사의 규모와 시행 방법, 유지 관리책 등이 상세히 적혀 있어 현재 진행 중인 청계천 복원공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관장은 “‘준천계첩’은 1760년(영조 36년)에 편찬된 것으로 국내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본”이라며 “오간수문(五間水門) 위에서 영조가 친히 준천 공역(公役)을 관람하는 모습을 그린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와 같이 공사 현장을 선명하게 담은 그림까지 실려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당시 서울은 왕조 개창 이후 수재와 환경오염 등으로 해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특히 그 중심부를 관통하는 청계천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이에 영조가 청계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단을 내려 1760년 개천을 ‘준천’하는 대역사를 벌였다. 당시 강바닥 토사를 걷어내고 하천을 정비하는 일을 ‘준천(濬川)’이라고 했다. 또한 영조는 준천 공역이 벌어지는 동안 직접 나와 현장을 독려하고 음식을 내려주기도 했으며, 공역 사업의 내용과 함께 공역에 참가한 신료들의 명단을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준천계첩’을 편찬케 했다.

‘청계천을…’에는 ‘준천계첩’을 원본의 크기와 색채 그대로 영인해 실었다. ‘준천계첩’은 영조가 준천 공역 담당 관료들의 공로를 치하해 내려 준 ‘어제어필(御製御筆) 서문’과 ‘어제 사언시(御製 四言詩)’, 공역 당시 현장의 모습과 공사가 끝난 뒤 연회를 베풀어 주는 장면을 담은 4장의 그림, 역사에 동원된 대규모의 참가 인원을 총망라한 인명록, 편찬 간행 경위를 밝힌 발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관장은 “특히 ‘준천계첩’ 첫 머리에 30자밖에 안 되는 ‘어제어필 서문’과 ‘어제 사언시’는 그동안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한문학자들도 제대로 번역해 내지 못했다”며 “30여 년 동안이나 이 자료를 붙들고 있었기에 이제야 제대로 번역해 출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제 사언시’에 나오는 ‘予聞光武 有志竟成(여문광명 유지경성)’의 ‘光武’가 후한의 광무제를 가리킨다는 점을 밝혀 ‘내가 듣건대 광무제(光武帝)도/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고 하였도다’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 관장은 상세한 해설과 주석을 달아 원본을 완역한 뒤 책의 뒷부분에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준천사실(濬川事實)’ 등의 자료에서 찾은 청계천 관련 기록들을 바탕으로 영조 대부터 고종 대까지 조선시대 준천의 역사를 상세히 고증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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