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권명아 교수 “中日전쟁 결과가 親日지식인 양산”

  • 입력 2004년 5월 19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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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내선일체론으로 돌아선 조선 지식인 일부는 “조선의 장정이 전부 국방의 의무를 지게 되는 날 조선인의 황국화는 완성된다”며 징병과 징용 선동에 앞장선다. 1940년대 초 징병에 끌려가는 조선 청년이 가족과 함께 일장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내선일체론으로 돌아선 조선 지식인 일부는 “조선의 장정이 전부 국방의 의무를 지게 되는 날 조선인의 황국화는 완성된다”며 징병과 징용 선동에 앞장선다. 1940년대 초 징병에 끌려가는 조선 청년이 가족과 함께 일장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일제강점기 친일문제를 윤리적 잣대가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성찰적 연구결과가 발표돼 주목된다.

연세대 국학연구원은 21, 22일 연세대 광복관 B106호에서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 인식과 대응’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발표자들은 일제 파시즘체제에서 이등신민을 꿈꿨던 조선 지식인과 민중의 나약한 초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국학연구원 이준식 연구교수(한국사)는 미리 제출한 논문 ‘파시즘기 국제정세의 변화와 전쟁인식’에서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어떻게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이 조선의 지식인들을 파고들어 그들을 아류 제국주의적 인식에 빠뜨렸는지 보여준다.

이 교수는 중일전쟁 발발 전후 경찰 조사기록 등을 근거로 민족운동가들의 성향변화를 비교했다. 이에 따르면 중일전쟁 발발 이전인 1937년 11월 경기도 경찰부 요시찰 대상이었던 민족운동가 725명 중 전향자 내지 준전향자는 144명(20%)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8년을 기점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 2·8독립선언 서명자였던 서춘과 이광수 등 지도적 위치의 민족운동가들이 대거 전향한다. 서춘은 중일전쟁 후인 1939년 한 잡지 기고문에서 “소화 5년(1930년)까지 21년간은 조선 사람 2300만명 거의 전부가 정신적으로는 일본인이 아니었지만 만주사변(1931년)의 결과 조선의 독립은 도저히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 교수는 이런 전향이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잘못된 국제정세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소극적 인식을 넘어 일제에 편승하는 것이 조선의 장래에 더욱 바람직하다는 잘못된 환상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내선일체론자들은 세계 질서가 유럽 미국 소련 일본 중심의 4개로 블록화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의 대국가체제로 재편될 때 서구의 ‘백색제국’이나 소련의 ‘적색제국’보다는 같은 아시아국가인 일본이 낫다는 나름의 인식체계를 세웠다. 여기에 북방(만주)과 남방(동남아) 등 일본이 새롭게 획득한 식민지와 조선이 차별화돼야 한다는 엉뚱한 콤플렉스도 작용했다. 즉, 제국주의 체제 서열에서 일본에 이은 2위의 서열을 꿈꿨던 것.

권명아 연구교수(한국문학)의 ‘태평양전쟁기 남방종족지와 제국의 판타지’라는 논문은 동남아에 대한 식민지 조선인들의 이런 이중적 의식을 더욱 뚜렷이 보여준다.

권 교수는 1942년 싱가포르 함락 후 조선에 불어 닥친 ‘남방열기’ 이상 현상의 이면에 작용한 이중의식을 꼬집었다. 당시 남방관련 보도가 100편이 넘었을 정도. 친일성향의 잡지 ‘조광’조차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염려된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대개의 보도는 남방 원주민들을 ‘더럽고 게으른 야만인’이라는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기에 급급했다.

권 교수는 당시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남방의 방대한 자원을 착취함으로써 조선 경제가 발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인식이자 새로 편입된 식민지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구식민지인 조선의 정체성이 취약해질지 모른다는 콤플렉스가 혼재한 양상이었다”고 분석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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