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러피]'헐크'…내 마음 속 '성난 헐크' 길들이기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6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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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감독의 ‘헐크’는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로서의 눈요깃감은 다소 부족하지만 분노와 관련된 우리 마음의 지도를 읽게 해주는 독특한 영화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리안 감독의 ‘헐크’는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로서의 눈요깃감은 다소 부족하지만 분노와 관련된 우리 마음의 지도를 읽게 해주는 독특한 영화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최근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 ‘헐크’를 보고 난 뒤 주변의 영화광들이 벌였던 가장 뜨거운 논쟁은 “헐크의 보라색 팬티는 왜 그의 몸이 거대해진 뒤에도 찢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그것이 신소재 고탄력 스판덱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했고, 혹자는 팬티가 찢어져서 그 안의 구조가 노출될 경우 불가피하게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아야 하므로 흥행에 타격을 입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현실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결론은 후자 쪽이 우세하게 났지만, 헐크의 팬티에 대한 미스터리는 아직도 확실히 풀리지 않고 있다.

어릴 때 TV 드라마로 봤던 ‘헐크’는 그의 옅은 눈 색깔과 사자 갈기 같은 머리, 너덜너덜 찢어진 바지가 좀 이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줬던 기억이 난다.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는 내레이션을 들을 때면,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분노에 차 있는지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리안(李安) 감독이 새로 만든 ‘헐크’는 그 생김새나 행동이 더 괴물 같고 극단적인데도 묘한 연민과 동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엄청난 파괴력과 비극적 운명에 아랑곳없이 ‘겨우’ 팬티 따위를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되는 것도 아마 그가 분노와 관련된 우리 마음속의 천진난만한 욕망을 은근히 자극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가끔,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자주 화를 내고, 자극을 받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사람은 다 그렇다. 굳이 헐크가 아니더라도 ‘나를 화나게 할’ 또는 ‘나를 불안하게 할’ 일은 ‘방사능’처럼 도처에 널려 있고 우리는 모두 거기에 노출되어 있다.

그럴 때 우리의 뇌와 몸속에 있는 시스템은 그런 자극에 맞서 싸울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를 저울질해서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맞서 싸워 이기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일단 피하거나 타협해야 할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헐크가 우리에게 주는 만족과 카타르시스는, 분노를 일으키는 대상과 타협하지 않고 늘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에서 온다.

물론 거기에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데 헐크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사람들의 비난과 몰이해와 오해가 그것이다. 때로는 내가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치 스파이더맨이나 ‘미녀와 야수’의 야수처럼) 헐크는 외롭고 불안하고 슬프다.

헐크가 되어 날뛰다 정상으로 돌아온 브루스(에릭 바나)가 회한에 가득 찬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은 우리 자신이 한바탕 화를 내고 난 뒤에 느끼는 허탈함과 당황스러움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그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낀다. 헐크가 사막과 우주 공간을 공처럼 튀어 다닐 때 우리는 그가 단지 환희에 차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결코 찢어지지 않으며 늘어난 다음에도 감쪽같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헐크의 팬티처럼, 감정대로 행하고 난 뒤에도 마음 한구석에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면 좋으련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화가 났을 때 헐크의 모습이 변하면서 파괴적이 되는 것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운명적으로 분노와 공격적인 본성을 유전자처럼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분노는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늘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도 사람을 화나게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 화를 낼 때, 특히 그 이유가 객관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을 때 “왜 그런 일을 갖고 화를 내니”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마음속의 외로운 헐크를 점점 더 커지게 할 뿐이다. 그보다는 “너는 화가 났구나. 하지만 조금 다른 방법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은 어떻겠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어머니 같은 존재인 베티(제니퍼 코널리)가 그의 분노를 받아들여 줌으로써, 헐크는 비로소 진정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런 어머니를 늘 희구하지만, 항상 가능한 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각자 스스로에게 그렇게 분노를 보듬을 수 있는, 관대한 어머니가 (혹은 고탄력 팬티가) 되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유희정 경상대병원 정신과 전문의 hjyoomd@unitel.co.kr

▼곁들여 볼 비디오/DVD▼

○ 성질 죽이기

비행기에서 말썽꾼으로 오해를 산 데이브(애덤 샌들러)는 법원에서 분노를 억누르는 치료를 받으라는 판결을 받고 할 수 없이 라이델 박사(잭 니컬슨)가 운영하는 ‘성질 죽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적절히 터뜨릴 줄도 알아야 한다. 참고 또 참았다가 결국 과다하게 폭발하는 청년에게 ‘성질 부리기’의 테크닉을 가르치는 코미디 영화.

○ 어플릭션

난폭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경찰관 웨이드(닉 놀티)는 아내에게도 이혼당하고 더 이상 딸을 만날 수도 없으며, 형제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이유를 댈 수도 없지만 불운이 누적되는 상황에서 웨이드는 급기야 폭발하고 파멸로 치닫는다. ‘택시 드라이버’ ‘성난 황소’의 각본을 썼던 작가 폴 슈레이더가 연출했다.

○ 28일후…

분노를 소재로 한 공포영화. 영국 케임브리지 연구소의 실험실에서 침팬지들에게 24시간 폭력비디오를 틀어주자 침팬지들은 ‘분노 바이러스’를 발생시키고, 런던 시민들이 감염된다.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었다가 28일 뒤에 깨어난 짐(실리언 머피)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감독은 ‘트레인스포팅’으로 유명한 데니 보일.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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