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러피]'장화, 홍련'…상처받은 꿈 "어른들은 몰라요"

  • 입력 2003년 11월 13일 17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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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은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사춘기 소녀들의 소망, 꺾여진 꿈과 상처가 꽃무늬들 사이에 아로새겨진, 슬픈 공포영화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장화, 홍련’은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사춘기 소녀들의 소망, 꺾여진 꿈과 상처가 꽃무늬들 사이에 아로새겨진, 슬픈 공포영화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지 1주일도 더 지났지만, 그날 저녁 들었던 한 여학생의 자살에 관한 소식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수능시험의 난이도와, 대리시험을 보다 들킨 대학생의 이야기 사이를 비집고 들려온 그녀의 소식으로 참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 길지 않은 뉴스 중 가장 마음에 걸렸던 말은 “시험을 보다가 성적을 비관해 자살했다”는 대목이었다.

좀 의아했다. 수능시험을 보다가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수능 점수와 관련된 이유란 법이 어디 있을까. 그 시절의 소녀들이란 수능시험의 100분의 1 무게도 되지 않는 일에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때로는 목숨을 걸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법인데. 그런 시간적 전후관계가 과연 죽은 그녀의 마음을 얼마만큼 설명해 줄 수 있는 걸까.

올여름 개봉되고 최근 비디오로 출시된 ‘장화, 홍련’은 무서운 영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너무 무서워 뒷목이 뻣뻣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그 무서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슬픔과 비슷한 정서만 묵직하게 남더라는 사실이다. 그런 기분엔 어김없이 영화 첫 장면부터 화면에 깔리던 꽃무늬들의 이미지가 함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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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장화, 홍련’은 그 슬픈 꽃무늬에 관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벽지와 앤티크 가구에 새겨져 있는 꽃무늬들은 그 집에 숨겨진 비극과 비밀을 감춰주는 은폐물이다. 그것은 마치 새엄마가 하이 톤의 목소리로 내지르는 “우리 집은 화목하고 즐거워!”라는 절박한 주장과도 같다.

이 때문에 그 집에서 일어났던 죽음의 사건들과 아버지의 외도, 그리고 (어쩌면) 근친상간적 관계에 관한 진실이 감히 표면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수미와 수연 자매가 입고 있는 귀여운 꽃무늬 옷들도 그녀들의 욕망과 죄의식,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마음을 감추고 억압해서 감히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드러내지 못하는 진심 때문에 결국 수미는 병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자살한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영화 ‘장화, 홍련’의 꽃무늬가 떠오른 이유는,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끊을 때마다 곧잘 거론되는 성적 저하, 부모의 불화, 따돌림, 아이의 내성적인 성격 등 표면적인 이유들이 어쩌면 그런 꽃무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점 때문이었다.

죽은 아이가 나타나 말해 주지 않는 이상 그 이유를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논리적이고 명백한 꽃무늬를 그 아이에게 입혀 놓음으로써 남아 있는 사람들은 덜 불안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어떤 경우는 교육 제도라든가 이혼율이라든가 경기침체와 같은, 각자에게 편리하게 적용할 수 있는 ‘꽃무늬’들이 제공되기도 하지 않는가.

꽃무늬는 살아 있는 아이들에게도 씌워져 있다. 바로 어른들의 기준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재단하는 것이다. 꽃무늬를 들추어내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거기 웅크린 아이들 나름대로의 우울과 크고 작은 상처, 어쩌면 쉽게 도와줄 수도 있는 성장의 통증 같은 것들이 조금 더 분명히 보일 것이다. 그렇게 들어주는 것은 아이들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미리 막을 수도 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른들 자신이 그 시절에 어땠는지를 가만히 돌이켜 보고, 아이들을 미리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면 된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유치할 수도, 엉뚱할 수도, 끔찍하거나 나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른들은 지레 불안해하거나 귀담아듣지 못한다. 영화의 원전인 고대소설 ‘장화홍련전’에서 귀신이 된 자매가 사또에게 원한 것이, 원수를 갚아 주기 이전에 그녀들의 끔찍한 모습을 놀라지 말고 바라봐 주고, 억울한 사연을 ‘들어’ 달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 불안한 시기의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려 준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학교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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