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5년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 입력 2003년 11월 19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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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20일 오전 5시.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은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황성신문사에서 사환 한 명과 함께 일본 경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20일자 황성신문 3000여부의 인쇄가 끝나 배달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는 일제에 의해 엄격한 신문검열이 실시되고 있었으나 위암은 이를 무시했다. 일제의 눈 밖에 난 기사는 활자를 뒤집어 인쇄하는 이른바 ‘벽돌신문’을 찍어내야 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언론사에 빛나는 큰 문장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은 세상 밖으로 나왔고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었다.

황성신문은 광고가 많지 않아 신문사 재정을 전적으로 구독료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제때 돈이 걷히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보다 못한 위암은 “신문의 역할이 눈과 귀와 같이 소중한 것인데 경영난으로 이제 붓을 땅에 던질 지경”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답지하고 고종은 전국 관아에 신문구독료 납부를 독려하도록 했다고 한다.

위암은 유학의 전통과 춘추(春秋)의 필법을 저널리즘에 접목시켰던 선각의 언론인이었다. 그는 말을 아꼈다. 그는 입으로만 떠벌리고 붓을 감추는 언론인이 아니라, 입술은 무디어도 붓은 날카로운 언론인이었다.

그에게 신문은 사초(史草)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도 자식만은 어쩌지 못했다. 장남이 조선총독부의 하급관리인 판임관에 취임해 속을 끓였다. 둘째가 중국 상하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터라 더욱 못마땅하였다. “자식을 친일하는 자라 하여 꾸짖고 욕하면서도 생활은 그에 의지하고 있으니…. 일본의 국록에 기댄 식객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시국을 개탄하여 아침부터 취침할 때까지 술로써 울분을 달래는 날이 많았던 위암. 그러나 그 자신도 말년에는 제국주의 침략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보지 못하고 ‘동양평화론’과 ‘한일동맹론’에 동조하는 우(愚)를 범하기도 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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