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山·색·힘…한국 추상미술 선구자 유영국 1주기전

  • 입력 2003년 11월 6일 17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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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1916∼2002·사진)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며 모더니즘 1세대 작가란 타이틀이 붙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됐다. 23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유영국 1주기 전’에는 마지막 작품 1점 등 미공개작 13점이 포함돼 그를 추억하는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유영국 미술문화재단(이사장 윤명로)과 갤러리 현대 공동 주최.

●마지막 작품-사진등 선보여

유영국 작 ‘Work’(1991년, 73X90 cm). 평생 시류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산(山) 추상’ 을 고집해 온 유영국은 간단한 선, 면, 색채로 산을 표현했다. 사진제공 유영국 미술문화재단

고인의 마지막 작품인 ‘Work’(1999)는 기존 작품과 분위기가 완연히 다르다. 좌우대칭 구도에 선들이 위로 상승하며 그려낸 산은 종교적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색깔도 아래쪽에서부터 진한 붉은 색, 검붉은 색, 주황에 가까운 붉은 색으로 이어지더니 위 바탕은 순수하고 맑은 붉은 색이다. 산을 그린 삼각형 두 윗변의 터치는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듯하지만, 뭔가를 놓아 버린 듯, 아니 뭔가 다시 쥐어 보려는 듯한 힘이 느껴진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그가 1940년대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던 20여 점의 흑백사진 작품들도 선보여 눈길을 끈다. 경주 불국사, 석굴암, 남산 일대를 찍은 이 사진들을 통해 그가 화가뿐 아니라 사진가로서도 대가(大家)적 경지를 이뤘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사진사연구소 최인진 소장은 “주제만 의도적으로 시각화했을 뿐 군더더기하나 없는 그의 사진은 인위적 냄새가 나지 않는다”며 “그에게 사진은 자연을 선과 면과 색채로 구성된 비구상적 형태로 관찰할 수 있게 해 준 도구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소개했다.

마지막작 'Work' 1999년 105×105㎝

그런 점에서 유 화백의 사진에는 그가 이후 보여 준 추상작업의 단초가 보인다. 그는 사실적이고 구상적인 경향의 작가들이 국전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무렵 ‘모던아트 협회’를 결성하고 반(反) 아카데미즘을 천명하면서 현대미술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아울러 평생 시류(時流)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산(山) 추상’을 고집했다. 그것도 간단한 선과 면, 다섯 가지가 채 안되는 색깔만으로 말이다.

윤명로 이사장은 “나무와 숲과 계곡과 그 속에 자리한 바람과 해와 달로 흔들리고 빛나는 풍경들은 그가 엮어내는 한결같은 조형의 주제들이었다”며 “즐겨 쓰던 빛깔들은 한정돼 있었지만, 교묘하게 짜여진 색채와 형태의 대비는 자연의 떨림을 가시적 대상으로 뒤바꿔 놓았다”고 평한다.

유 화백은 담백하고 과묵한 자신의 그림처럼 ‘그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절대 논리를 몸으로 실천한 예술가였다. 교수로서 서울대(2년3개월)와 홍익대(3년)에 잠깐 몸담기도 했지만, 후배나 제자를 키우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 25년 넘도록 심장 박동기를 가슴에 달고 살았고 7, 8번씩 쓰러지기도 했지만 결코 붓을 놓지는 않았다.

1941년에 찍은 경주 오릉.

●'山 연작' 추상과 서정 조화

1961년 정초 한 신문에 실린 글에는 그의 치열한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구태여 날더러 금년에 무얼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쑥스러운 욕심도 없지 않으나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화면에 몸뚱이 채 부딪쳐 보고자 한다. 추운 얘기는 궁상스러우니 그만두더라도 다가올 여름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팬츠바람으로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일할 맛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만 같다.”

맏딸 유리지 교수(59·서울대 미대)는 “아버지는 작가로서, 예술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분”이라며 “작가에겐 자기만족이 가장 무섭다는 말씀이 아직도 쩌렁쩌렁하다”고 말했다. 02-734-6111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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