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경의 뉴욕이야기]“소호에 가면 예술이 보인다”

  • 입력 2003년 10월 16일 17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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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에는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 100년이 넘은 빵집 올리브스의 전경(왼쪽). 장신구를 파는 조그만 가게(오른쪽 위)와 카페 언타이틀의 내부.사진제공 정희경씨

소호에는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 100년이 넘은 빵집 올리브스의 전경(왼쪽). 장신구를 파는 조그만 가게(오른쪽 위)와 카페 언타이틀의 내부.사진제공 정희경씨

‘카페 지탕(cafe zitane)’의 두껍게 썬 바게트 토스트와 샐러드, 허브 아이스 티. ‘카페 아바나(caf´e Havana)’의 치즈를 듬뿍 올려 그릴에 구운 옥수수 스틱.

날씨 좋은 날 ‘소호(SOHO)’에 갈 때마다 내가 즐겨 먹는 점심 메뉴다.

소호. 사우스 오브 휴스턴(South of Houston)의 약자로 뉴욕의 휴스턴 거리 남쪽에서부터 차이나타운으로 잘 알려진 캐널 거리까지를 가리킨다.

뉴욕 지하철을 타고 프린스역에서 내리면 19세기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한 뉴욕 문화의 중심지, 소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프라다 샤넬 신시아롤리 안나수이…. 화려한 의류가게의 쇼윈도들 앞으로 주말이면 노점상들이 빼곡히 들어차며 대조를 이룬다. 주차 공간을 찾으려면 몇 바퀴씩 도돌이표를 찍는 차들도 돌길 위에 가득 찬다.

●공장-창고를 작업공간으로

소호의 역사는 길다. 1900년 초부터 1960년까지 공장과 창고 지역이던 소호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던 젊은 예술가들이 이주하면서 일대 변화를 맞는다.

젊은 그들은 천장이 높고 공간이 넓은 창고를 화랑으로 개조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공장은 사라지고 ‘예술적 선구자’들이 거리를 점령한다. 미니멀리즘을 표방한 채.

젊었던 예술가들은 나이가 들고, 돈을 벌어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1980년대부터는 특권층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화려하고 비싼 클럽이 들어서고 식당과 일대 상점들이 고급스럽게 바뀌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일대 변신한다.

그러는 사이 젊은 선구자적 예술가들은 치솟는 집세와 변질되는 분위기를 피해 첼시로, 다시 브루클린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렇게 도시는 흥하고 망하나보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며칠간 잘 버텨왔던 나의 다이어트는 옥수수 스틱의 유혹에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치즈를 듬뿍 얹어 그릴에 구워내는 옥수수는 프린스와 엘리자베스 거리 사이의 길모퉁이에 위치한 쿠바 식당 ‘카페 아바나’에서 파는 메뉴다. 간식으로는 그만이다.

몇 년 전 유명가수의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로 유명해진 이 식당은 옆 가게를 사들여 테이크아웃 전문 음식점으로 꾸몄는데 옥수수 스틱 이외의 메뉴는 내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나이가 들면서 음식에 탐닉하는 내 자신에 은근히 놀라곤 한다. 맛있는 음식 한 접시에 더 없이 행복해하거나 기대에 떨어지는 음식에는 배신감에 한참을 분해 한다.

옥수수를 한 입 가득 문 채 골목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럴 때마다 건축을 전공한 내 친구 병안의 말이 떠오른다. “뉴욕의 좁은 도로와 짧은 블록으로 된 거리는 걷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대중교통을 발전시켰어. 정장에 운동화를 신는 유행도 이처럼 ‘걷는 문화’에서 나왔지. 한국에서는 8차로 넓은 도로 위에서 자가용을 몰면서도 ‘뉴요커’의 유행만은 따라하니, 우습지 않아?”

●"한국음식 세계화에 일조"

소호의 매력은 2차로 정도 됨직한 골목들이 넓은 지역에 골고루 발달해 볼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예술의 거리라는 명맥을 유지하는 화랑도 아직 여러 곳이며 이민자의 구역답게 세계 각국의 메뉴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언젠가 ‘발서자(Balthazar)’라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억만장자 부동산 개발업자인 도널드 트럼프를 만나기도 했다. 100년이 넘은 빵집 ‘올리브스(Olive's)’의 빵 맛은 오랫동안 변치 않았다.

‘머서’ 거리에 자리 잡은 ‘우래옥’은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일조하고 있다. 파란 눈의 웨이터가 “갈비구이, 레몬소주”를 발음할 때면 왜 그리 어깨가 으쓱해지는지. 만만치 않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음식 맛과 분위기에 두둑한 팁을 내놓는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다음 블록에 자리한 ‘카페 언타이틀’도 한국 사람이 경영한다. 3층 높이는 됨직한 천장을 향해 키 큰 나무가 자라고 있고 여기 저기 놓인 낡은 소파에는 그만큼 자유로운 자세의 손님들이 있어 근사한 곳이다. 커다란 그림이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이곳의 주인은 예전에 화상이었다던가.

뒷골목에 있는 신인 디자이너의 옷가게는 몇 년 후쯤 유명 브랜드가 돼 대로변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계절에 맞춘 새 디자인으로 디스플레이를 바꾸고 있는 ‘리바이스’ 옆에는 중고 청바지 전문점도 성업 중이다.

한참을 걸었을까. ‘워싱턴 스퀘어 아치’가 눈에 들어온다. 뉴욕의 또 다른 얼굴인 ‘5번가’가 시작되는 그곳은 지친 발걸음을 쉬기엔 더없이 좋은 공원이다.

그 옆에서 ‘뉴욕대(NYU)’ 학생들이 색소폰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있다. 1달러 지폐를 바구니에 넣고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옆 벤치에 자리 잡았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오늘 저녁은 뭘 해서 먹지?’aprilhk8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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