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김시습 평전'…천재 김시습은 '자유의 사상가'

  • 입력 2003년 4월 11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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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은 자신의 화상 위에 이런 글을 적었다. “이하(李賀)를 내리깔아 볼 만큼/ 해동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격에 벗어난 이름과 부질없는 명예/네게 어이 해당하랴/네 형용은 아주 적고/네 말은 너무도 지각없구나/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골짜기 속에.”사진제공 돌베개
김시습은 자신의 화상 위에 이런 글을 적었다. “이하(李賀)를 내리깔아 볼 만큼/ 해동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격에 벗어난 이름과 부질없는 명예/네게 어이 해당하랴/네 형용은 아주 적고/네 말은 너무도 지각없구나/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골짜기 속에.”사진제공 돌베개
김시습 평전/심경호 지음/715쪽/2만8000원/돌베개

“태어나 사람 꼴 취하였거늘/어찌해서 사람 도리 못 다 하였나/젊어선 명리를 일삼았고/장년이 되어선 자빠지고 넘어졌네/고요히 생각하면 부끄러운 걸/진작에 깨닫지 못하였나니/ 후회해도 지난 일을 돌이킬 수 없기에/잠 못 이루고 가슴을 방아 찧듯 쳐댄다/ …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묘표를 만들 적에/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나의 마음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품은 뜻을 천 년 뒤에 알아주리.” (‘나의 삶(我生)’ 중에서)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1435∼1493)은 일생을 돌아보며 자신을 ‘꿈꾸다 죽은 늙은이(夢死老)’로 기억해 달라고 했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세 살 때 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다섯 살 때 세종의 칭찬을 받은 뒤 ‘오세(五歲)’란 별명으로 불렸던 천재. 그는 일찍부터 세상에 알려진 천재였기에 오만하다고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세상과 쉽게 타협할 수 없었기에 일평생을 아웃사이더로 맴돌며 고뇌해야만 했다.

그는 한국 전기체소설(傳奇體小說)의 효시라는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저자이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이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박차고 나서서 일생을 떠돌았던 지조 있는 방랑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200여편의 시에 자신의 삶과 생각을 담아 세상에 남긴 그는 그렇게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시와 산문을 썼던 자유의 문인, 유학의 이상을 글과 행동으로 실천한 올곧은 선비, 불교와 유교를 소통시키려 고민했던 철학자, 탈속과 환속을 반복하며 오직 진리만을 추구했던 수행자, 국토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깃들인 역사를 찾아 방랑했던 여행가…. 그는 이 모든 것이었다.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4년여의 작업을 통해 그를 둘러싼 신화와 오류를 벗겨내며 인간 김시습의 역사를 엮어냈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그를 “마음은 유학자이되 겉으로는 불교도(心儒迹佛)” 또는 “행동은 유학자이면서 겉모습만 불자(行儒而迹佛)”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사상을 면밀히 추적한 저자는 그가 유학과 불교를 모두 깊이 이해하고 두 가지 사상을 모두 넘나들며 오직 진리를 추구한 ‘자유의 사상가’라고 평가한다. 세조의 왕위 찬탈 사건을 겪으며 유학의 명분과 절의(節義)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그는 다만 “‘세상일 잊는 데 과감하지 못하여’ 환속과 탈속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세상을 응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친 짓을 하며 방랑자로 전국 방방곡곡을 흘러 다녔다.

“나는 알지, 나는 알지/손뼉 치며 깔깔 한바탕 웃노라/옛날 잘난 이 모두 본질을 잃었나니/시냇가에 초가 지어 사는 것만 못하리/ … 한 벌 베 적삼에/팔 걷어붙여/앙상한 뼈, 솟은 힘줄 드러내고/농군 모자 끈을 늘어뜨린 채/남과 나의 구별을 아예 모르리/달 아래 요뇨탄(腰(뇨,요)灘)가를 거닐며 노래 뽑다가/구름 자욱한 골짝으로 들어간다, 어허허.” (‘깔깔대며 웃는다(謔浪笑)’ 중에서)

그는 현세에서 불행하게 살다 떠났지만 조선시대 내내 수많은 학자와 왕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500여년 후 뜻밖에 지우(知友)를 만나 700여쪽의 두툼한 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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