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서 들리는 법정의 죽비소리…KBS 1TV 인물다큐 방영

  • 입력 2003년 4월 4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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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동아일보 자료사진
법정 스님 -동아일보 자료사진
“저것 봐. 꼭 산꼭대기에서 흰 공이 굴러오는 것 같지 않아.”

‘무소유’의 법정(法頂·72) 스님이 지인들에게 늘 자랑한다는 전남 송광사 불일암(佛日庵)의 월출. 둥근 보름달이 정말 산을 타고 넘어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달이 산 위로 둥실 떠오르자 이번엔 달맞이꽃이 고개를 들어 꽃잎을 터뜨린다.

불일암의 월출과 함께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본격 다큐멘터리가 13일 오후8시 KBS 1TV ‘일요스페셜’(PD 서용화)을 통해 방영된다. 서 PD가 지난 2년여간 법정 스님 곁에서 시봉들 듯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은 노작(勞作)이다. 음악은 노영심씨가 맡았다.

오래 전부터 TV와는 담을 쌓고 있고, 수년 전부터는 일간지 기고도 중단한 스님의 일상과 수행 방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다.

# 직접 군불 때고 밥 짓고… 소박한 삶 즐겨

직접 군불을 때며 밥을 짓는다. -사진제공 KBS

불일암에는 책상 겸 식탁, 이불용 방석, 호롱불, 다기 외에는 가재도구가 없다.

“주거 공간은 단순해야 해. 방안에 너무 많은 걸 들여 놓으면 거기에 신경이 쓰여서 광활한 정신 공간이 없어져. 빈방에 있으면 온전한 자기를 누릴 수 있지. 아무 것을 갖지 않으면 다 가질 수 있어. 텅빈 충만감이라고나 할까.”

스님의 법문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방송인 이계진씨가 불일암으로 찾아오자 스님은 차를 권하며 시 한 수를 들려준다.

“차 한 잔은 목과 입을 축여 주고 두 잔을 마시면 외롭지 않고 석 잔째엔 가슴이 열리고 네 잔은 가벼운 땀이 나 기분이 상쾌해지며 다섯 잔은 정신이 맑아지고 여섯 잔은 신선과 통하며 일곱 잔엔 옆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나온다.”

스님은 이곳에서 직접 장작을 패고 군불을 땐다. 그리고 오전 3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예불과 참선을 하고 1시간 동안 방선(放禪)한다.

# 자연은 이웃… 더불어 함께 살아야

숲 사이를 걸어가는 법정 스님. -사진제공 KBS

“사람들이 가끔 혼자서 자연에 틀어박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어봐. 하지만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세상에 큰 피해는 주지 않는구나 하는 심정이야. 내가 여기서 보고 들은 자연의 교훈과 아름다움을 책으로 보여주는 것도 밥값 정도는 하는 거지.”

스님의 세상 인연은 서울 성북구 길상사를 통해, 그리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맑고 향기롭게’를 통해 이뤄진다. 스님은 두 달에 한 번씩 길상사로 내려와 법문을 들려준다.

“이웃을 도와주는 건 보시가 아냐. 그건 개체로서의 자기가 이웃을 통해 무한히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지. 개체가 전체로 나가는 길을 돕는 게 온전한 종교의 역할이기도 하고.”

스님의 이웃은 사람만이 아니다. 스님이 불일암에서 매일 꼭 하는 일 중의 하나가 헌식대(獻食臺)에 새를 위한 모이와 물을 갖다 놓는 것. 새 시냇물 달 등 모든 자연이 이웃이고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안돼…증오는 눈을 멀게 할뿐”

뉴욕 한인 불자들의 초청으로 지난해 가을 미국을 방문한 스님은 9·11테러의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를 찾았다.

“‘이에는 이’로는 안돼. 증오를 가지면 눈이 멀게 되지. 끌어안아야 해. 전쟁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테러도 사라지지 않고.”

스님은 이어 월든호수로 가서 150년 전 헨리 소로가 살던 곳을 찾았다. 소로는 이곳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2년 2개월간 자연을 벗하며 살았던 사상가.

“자연이 그를 가르쳤어. 그는 학생으로 이곳에 와서 스승이 돼 나갔지. 자연은 우리에게 한두 가지에 만족해야지, 100가지 모두 만족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지. 톨스토이가 그랬다던가. 왜 미국인들은 소로의 말을 듣지 않고 정치가와 군인의 말을 듣는가 하고. 자연엔 증오가 없어.”

# ‘내가 누구인가’ 화두 잡고 정진 또 정진

스님의 화두는 뭘까.

“‘내가 누구인가’가 화두지. 해답은 없어. 각자에게 주어진 근원적 물음을 항상 갖고 있어야해. 순간순간 그 물음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해. 그래야 사는데 중심을 잡을 수 있어.”

스님은 오래전부터 천식 기운이 있다.

“예전엔 기침이 나면 짜증이 났어. 특히 한밤중에 기침 때문에 깰 때는. 그런데 기침으로 깬 뒤 달도 보고 밤에 핀 꽃도 즐길 수 있어 참 좋더군. 이제 모든 걸 거부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 죽음까지도….”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다큐제작 서용화PD ▼

TV 카메라를 기피하는 법정(法頂) 스님을 2년간 쫓아다녀 허락을 받아내고,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독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만나본 그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노력형 PD였다. 아마도 그런 점이 스님의 마음을 열었는지 모른다. KBS 교양국 서용화 PD(33·사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2년 가까이 법정 스님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며 어느새 스님의 팬이 돼버렸다.

“2001년 4월 서강대 왕상한 교수의 소개로 법정 스님을 길상사에서 처음 만났죠. 그냥 인사와 덕담만 나눴을 뿐 촬영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죠. 그저 ‘사람은 서로 그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만 하셨어요.”

인물 다큐는 원래 잠자는 것, 화장실 가는 것만 빼고 모든 생활을 밀착 취재해야 하지만 법정 스님의 카메라 기피증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전생의 인연이 있었을까. 서 PD는 서두르지 않았다. 스님이 법문을 하러 길상사에 내려올 때마다 찾아뵈었다. 물론 인터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마 서둘렀으면 실패했을 거예요. 6개월가량 지난 뒤 어느 날 법정 스님이 저를 불러 방송에 대해 물으셨어요. 이젠 카메라맨을 불러도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죠.”

하지만 처음엔 스님에게 마이크를 들이댈 수가 없어 ‘벙어리 장면’만 찍어야 했다.

“스님은 ‘필름 아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자신의 모습과 말을 찍어서 뭐 하느냐는 것이죠. ‘좋은 말, 좋은 모습은 시중에도 넘치니까 여기서는 자연을 느끼고 자연을 담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찍은 30분짜리 비디오 테이프가 모두 100여개. “스님과 함께하며 참 멋에 대해 알게 됐죠. 특히 스님이 주시는 매화차와 연꽃차를 마시면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습니다.” 2월경 청매화가 몽우리를 맺을 때 그걸 따서 차에 넣으면 매화가 찻잔 속에서 천천히 꽃을 피운다. 또 한여름엔 낮에 벌어진 연꽃 속에 찻잎을 조금 넣어 두면 밤에 연꽃잎이 닫히고 다음날 아침 찻잎을 꺼내 차를 달이면 연꽃 향기가 은은히 풍겨난다.

“처음엔 스님이 주로 기거하시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을 찍고 싶었어요. 스님이 상좌에게도 알려주시지 않는 곳이어서 욕심이 났죠.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오히려 ‘여백’을 남겨둔 것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그는 어느새 스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인생에서 세 번 기쁜 일이 있었다면 아내(MBC 이언주 앵커)를 만난 것, 아기가 태어난 것 그리고 법정스님을 만난 것입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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