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단편소설]김나정/비틀즈의 다섯번째 멤버1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5시 48분


그림 박수룡
그림 박수룡
“멍멍아, 머엉멍아”

예닐곱 살 아이가 동무를 불러내 듯 사내의 목소리는 한껏 다정했다. 그러나 개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사내는 어기적어기적 개집 쪽으로 더 바짝 다가갔다. 나무판자를 스치는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줄 끝을 더 바짝 잡아당기자 개집 속에 웅크린 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사내는 욕설과 함께 두 팔을 개집 안에 밀어 넣었다.

사내의 비명 소리는 요란했으나 늙은 개의 이빨은 사내의 팔에 박히지 못하고 상채기만 냈을 뿐이다.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 배어 나오는 피를 본 사내는 소녀에게 당장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냉면 그릇에 담긴 뜨거운 물을 개집 안으로 끼얹자 개는 신음소리를 내며 개집 밖으로 튀어나왔다. 부글부글했던 털이 몸통에 흠뻑 달라붙자, 개는 형편없이 작아 보였다. 사내는 낑낑거리며 개집 앞을 빙빙 돌고 있는 개를 잡아 자루 안에 쑤셔 넣었다. 자루 밖으로, 온몸을 뒤틀어대는 개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대문이 닫히고 점점 개 짖는 소리가 멀어졌다. 소녀는 냉면 그릇이 뒤집어져 놓여 있는 개집 앞에 주어 앉는다. 이제 텅 빈 개집 안에는 개털이 군데군데 묻은 낡은 담요와 찌그러진 알루미늄 밥그릇만 남아 있다.

비닐봉지를 뒤집자 감자 몇 알이 굴러 나왔다. 소녀는 과도를 치마에 문질러 닦고 감자에 난 싹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싹이 도려내진 자리에 감자의 하얗고 물기 많은 속살이 드러났다. 연두 빛 감자 싹은 신문지 위로 떨어지고 그 밑으로 얼굴이 검은 여자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사진 위로 떨어진 감자 껍질을 걷어내고 소녀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뒤에 무너진 집이 있다. 지붕은 날아갔는지 무너져 내렸는지 보이지 않고, 벽 한 장과 큰 창틀만 달랑 남아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왼쪽 뺨과 턱에는 피 같은 것이 묻어 있다. 여자의 품에 안긴 아이는 정수리만 보여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진 아래 분명히 무언가 쓰여 있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녀는 여자와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도리가 없다.

사진 찍히는 순간 무슨 말을 했는지 여자의 입은 크게 벌어져 있다. 흑백 사진 속 여자의 입안은 컴컴했다. 소녀는 들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여자의 입 속을 들여다보았다. 흙덩이가 사진 위로 점점이 떨어졌다. 감자는 깎여 나가고 동그랗게 말린 감자 껍질 밑으로 여자와 아이의 모습은 사라져갔다.

이빨이 부실한 개는 삶은 감자를 으깨주면 알루미늄 그릇에 광이 날 정도로 싹싹 핥아먹곤 했다. 개천가에서 금수장 사내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친구들은 자루 속의 개를 각목으로 후려쳤을 것이다. 자루에 핏자국이 배어들고, 개의 신음 소리는 점점 잦아 들어가고, 개천가로 산책을 나온 부모들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안간힘을 쓸 것이다.

천장 쪽에서 틉틉 소리가 들려왔다. 깍은 감자를 봉지에 넣던 소녀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방 한 마리가 천장에 달린 등에 제 몸을 부딪치고 있다. 나방의 날개 짓에 따라 방안을 비추는 불빛이 어지러워졌다.

날개 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장님이 돼.

주인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마당에 떨어진 나방을 신발로 문질러댔었다. 사내가 발을 떼어내자 뭉개진 나방의 잔해가 드러났다. 제 몸에서 나온 진물 위에 누운 나방은 찢겨진 한 쪽 날개를 간혹 펄럭댔다. 사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소녀는 마당에 놓인 돌을 가져다 나방 위에 올려놓았었다. 나방의 날개가루가 들어가면 눈이 멀어. 소녀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잠에서 덜 깬 소녀는 시계부터 올려다보았다. 새벽 3시. 창문이 한번 더 떨렸다. 현관방에 달린 작은 창문을 밀자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여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일행이 있냐는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창문 밖으로 숙박부와 볼펜을 내밀었다.

여자가 내민 지폐를 금고에 넣고, 소녀는 물병과 수건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촉수가 낮은 등이 켜진 복도로 나섰다. 더듬더듬 소녀의 뒤를 따라가는 여자의 발소리에 물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묻어났다.

복도에 줄 지어 서 있던 난 화분 하나가 엎질러졌다. 여자는 기타 케이스를 든 채 소녀와 난 화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붉은 양탄자 위에 가벼운 돌들이 흩어져 있고, 난의 길쭉한이파리들은 화분 밑에 삐져나와 있다. 이층 복도에 줄지어 선 난초들은 물을 주어도 잎 끝부터 말라 비틀어졌다. 플라스틱 화분을 세우고 돌들을 쓸어 담는 여자를 내버려 두고 소녀는 이층 끝 방의 문을 열었다.

손님을 받지 않은 2층 끝 방의 문을 열자 퀘퀘한 냄새가 밀려나왔다. 어느 구석에서 죽은 쥐가 썩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내가 놓은 쥐약을 먹은 쥐들은 여인숙 구석구석에서 몰래 죽어갔다. 쓰레받기로 몇 번이나 쓸어 담아 버려도, 쥐들은 끈덕지게 피를 토하며 어디선가 기어 나왔다.

방으로 들어온 여자는 들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침대 위에 놓고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자 방안으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푸른 모기장이 쳐진 창 밖으로 공장과 배의 굴뚝 끝에 달린 붉은 등이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창 밖을 내다본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허리선까지 내려와 있다.

탁자 위에 생수병과 타월이 놓인 쟁반을 올려놓자, 여자는 소녀에게 난초 값을 묻더니,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빼내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는 받은 지폐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자 복도 밖까지 흘러나왔던 여자의 긴 그림자는 잘려나갔다.

현관방으로 돌아온 소녀는 낡은 장롱 문을 열고 이불 밑에 파묻혀 있는 스타킹 상자를 꺼냈다. 외항선 선원들이 준 이국의 동전들이 몸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주위를 힐끗거리며 소녀는 상자 안의 지폐를 세 본다. 지폐의 끝에 침이 묻어났다. 앞장부터 세보고 뒷장부터 다시 세보고,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하며 오천 원을 더했다 빼본다.

골목길을 빠져나가 큰 길 정류장에서 162번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면 여객 터미널이다. 편도행 티켓 가격은 11만원이다. 대합실 매점에서 선물을 사고, 안개가 끼지 않기를 바라며 자판기에서 따뜻한 밀크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셔도 좋을 것이다.

불을 끄고 눈을 감자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기타 소리는 소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고 누운 소녀의 몸이 천천히 방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배에서 내리면 머리를 길게 기르고, 누군가와 사랑을 할 것이다. 그래, 그에게 기타를 쳐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특산물도 없는 이 항구 도시는 언젠가 영영 잊혀질 것이다.

사내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에서 소주병과 더불어 쓰러져 있을 것이고 오후 나 되어야 여인숙으로 돌아올 것이다. 칫솔질을 하자 구역질이 났다. 소녀는 방안으로 기어 들어와 찐 감자를 입에 우겨 넣었다. 감자를 씹으며 소녀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랐다.

벽에는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해변에 누워 있는 달력이 걸려 있다. 손에 알록달록한 우산이 꽂힌 컵이 쥐고 비키니 차림의 여자는 달력 밖의 누군가를 향해 한 달 내내 미소를 지을 것이다. 감자덩이가 목구멍을 넘어갔다. 달력 속 여자의 웃는 얼굴 위에는 모기 한 마리가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다. 죽은 모기의 다리들이 낱낱이 떨어져 나와 여자의 얼굴에 붙어 있다. 모기의 몸 밖으로 튀어나온 핏방울은 이제 검붉게 변해 있다.

맨 정신의 사내는 절대 소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술에 취한 그는 키득거리며 소녀를 범했다. 세 달 전부터 생리가 나오지 않는다. 배는 점점 불러올 것이고 사내는 금고에서 꺼낸 돈을 주머니에 꾸겨 넣고 소녀를 시장 골목에 있는 돌팔이 의사에게 데려갈 것이다. 끄집어낸 태아는 한 개 당 20만원에 한약방으로 팔려나간다고 했다.

소녀는 컵을 든 채 달력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머리를 풀어헤친 반나의 여자들이 한 명 씩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눈이 내리고 다시 봄이 온다. 바다 건너 도시에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아이의 엄마에게는 아이의 운명이 적힌 노란 종이를 준다. 소녀는 배를 가만히 쓸어 내려보았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에 귀를 갖다 대자, 큰 배가 멀리로 떠나는지 긴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에서 204호 열쇠를 골라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벽에 걸린 여자의 원피스 자락을 흔들고 있다. 물걸레와 빗자루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녀는 침대 옆 탁자로 다가갔다. 휴지통은 텅 비어 있다. 전등 아래 놓인 지갑이 보였다. 복도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을 삼키며 지갑을 열었다. 소녀는 재빨리 오천원 짜리 한 장과 만 원짜리 한 장을 끄집어 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여전히 복도 쪽은 고요했다. 소녀는 지갑을 이리저리 뒤져본다. 신용 카드 두 장과 주민 등록증이 꽂혀 있었다. 소녀가 주민 등록증을 빼내자 그 뒤에 꽂혀 있던 종이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문지에서 오려낸 사진이었다. 오려낸 지 꽤 오래되었는지 종이 조각의 네 귀퉁이는 나달나달해져 있다. 소녀는 슬쩍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피아노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피아노는 검은 색이고, 소녀의 땋아 내린 머리카락 끝에는 터무니없이 큰 리본이 달려 있다. 어둠 속에서 본 여자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너무 늙었거나 주민등록증이 없는 여자들만 여인숙을 들락거렸다. 주민등록증 사진 속의 여자는 단발머리다. 소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주민등록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갑에 신문지 조각을 밀어 넣고 소녀는 침대 위에 놓인 기타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자줏빛 비로드로 안감을 댄 케이스 속에 짙은 밤색의 기타가 누워 있다. 소녀는 침대 위에 안장 검지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튕겨 보았다. 가볍고도 텁텁한 소리가 났다.

목욕을 하다가 나왔는지 여자는 알몸이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졌다. 여자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배에는 길게 흉터 자국이 나 있고, 소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서둘러 기타 케이스의 뚜껑을 덮다가 소녀의 손이 뚜껑 사이에 끼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소녀는 피 맺힌 손가락을 입 속에 넣었다. 여자는 소녀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 들여다보았다. 괜찮으냐고 묻는 여자의 목소리는 감기에 걸렸는지 약간 쉬어 있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소녀의 치마 위로 점점이 적셨다.

소녀는 입을 틀어막더니 여자가 나온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습기를 먹어 뒤틀어진 나무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변기 뚜껑이 열고 소녀는 먹은 것을 게워냈다. 시큼한 냄새가 났다. 변기 속에 허옇게 거품이 일어난 감자 덩어리가 떠올랐다. 배를 그러잡은 채 물 고리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덜컥덜컥 소리만 났다. 소녀는 욕조에서 물을 퍼 변기 속에 들이부었다. 여자는 목욕을 하다가 잠이 든 모양이다. 욕조 안의 물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다. 물을 몇 번이나 들이부어도 토사물은 흩어지기만 하고, 정화조 속으로 끌려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옷을 걸치고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여자는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으냐고 묻자 소녀는 머뭇거렸다. 지갑은 전등 아래 얌전히 놓여 있다. 소녀는 손등으로 입가의 물기를 문질렀다.

여자의 시선이 소녀의 아래 배에 잠시 멈췄다. 여자는 다시 한번 소녀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소녀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여자에게 비키라는 시늉을 하며 시트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탁자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소녀의 나이를 물었다. 소녀는 걷어낸 시트를 뭉쳐 복도 쪽으로 던졌다. 하루 더 묵을 거냐고 묻자 여자는 그렇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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