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의 테마여행]자이싱 2세가 세운 도시 인도 자이푸르

  • 입력 2002년 12월 12일 16시 08분


자이푸르의 상징인 바람궁전 하와마할. 하렘의 여인들이 바깥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정교하게 조각된 테라스의 창은 여인들이 머리를 내밀고 저잣거리를 내다볼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만들어졌다./사진제공 캠프
자이푸르의 상징인 바람궁전 하와마할. 하렘의 여인들이 바깥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정교하게 조각된 테라스의 창은 여인들이 머리를 내밀고 저잣거리를 내다볼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만들어졌다./사진제공 캠프
나라 전체에 종교적 에너지가 넘치는 인도는 여행자들에게 꿈의 목적지다. 부자와 빈자의 공통점이라고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는 것 뿐, 걷는 땅조차 다른 이 ‘절대세상’에는 현대 도시인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그런 모든 실재는 대부분 이곳에서 왕국을 이뤘던 마하라자들의 흔적과 연관된다. 라자는 산스크리트어로 부족의 우두머리, 마하는 그중 가장 강력한 통치자를 지칭한다. 여러 봉건 제후들이 인도를 분할하고 있던 시대에 왕들은 오랫동안 마하라자로 불렸다.

타지마할을 만들었던 이슬람의 마하라자 샤자한과 자이푸르를 건설한 힌두의 마하라자 자이싱 2세. 모스크와 힌두사원이 공존하는 인도에선 이 두 사람의 궤적을 따르지 않고는 제대로 관광을 했다고 할 수 없다. 특히 ‘핑크 시티’로 불리는 자이푸르에선 도시 어디서든 자이싱 2세의 흔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별들에게 미래를 물은 현자, 자이싱 2세

인도를 일주일 동안 돌아볼 예정이라면 골든 트라이앵글이 핵심 코스다. 행정수도인 델리를 기점으로 힌두와 이슬람 문화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이푸르, 타지마할로 이름난 아그라로 이어지는 이 황금코스는 인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들이다. 이 중 자이푸르는 지혜로운 왕, 자이싱 2세에게 헌정된 명예의 전당 같은 도시다.

델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266㎞ 떨어진 자이푸르는 광대한 타르사막을 끼고 있는 라자스탄주의 주도이다. 1728년 이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던 사와이 자이싱 2세(1699∼1744)가 만들었다. 도시의 이름조차 왕의 이름을 본떠 자이푸르(‘승리의 도시’라는 뜻)로 명명됐다.

푸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는 뜻. 이름처럼 구 시가지는 7개의 문을 지닌 성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구 시가지 북쪽의 언덕에 올라 자이푸르를 내려다보면 강렬한 태양빛 아래 드러나는 분홍빛의 도시전경을 훑어볼 수 있다.

16세기 자이푸르가 있던 라자스탄은 이슬람 세력에 항거하는 힌두교 소왕국들이 할거하는 땅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인 무굴왕조의 번성에 따라 소왕국들은 더 이상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이에 복속하게 되었다.

많은 라지푸트족 전사들이 무굴제국의 정복왕 아우랑제브에게 저항하다가 멸망했지만 자이싱 2세만큼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아우랑제브는 자이싱 2세에게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겠는가?”라며 정복자의 오만함과 권위를 실어 호통을 쳤다.

그러나 불과 열한살의 나이로 성주가 된 자이싱 2세는 겁먹은 기색 없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를 보호해준다면,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당당히 답변했다. 아우랑제브는 그런 대담함을 높이 사서 자이싱 2세에게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4분의 1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사와이’란 칭호도 황제의 권한 중 4분의 1을 자이싱 2세에게 선사했다는 의미다.

자이싱 2세는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이자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일족의 딸들을 무굴 황제의 측실로 보내 제국의 보호를 이끌어냈고, 안정된 기반에서 경제적인 발전을 꾀했다. 힌두나 이슬람을 가리지 않고 양쪽의 고전과 언어, 종교사상, 전통의학을 공부했고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는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힌두의 고전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의 기하학, 천문학 서적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서 활용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의 문헌들도 받아들였다.

오늘날 시티펠리스로 불리는 궁전과 그 동쪽의 바람궁전(하와마할·Hawa Mahal)은 자이푸르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자이싱 2세가 1726년 도시 중심에 세운 시티 펠리스는 7층 건물. 현재 그 일부가 박물관으로 개조돼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시티펠리스 안에는 지금도 천문대로 이용되는 잔타르 만타르(‘기묘한 기구’라는 뜻)가 있다. 이곳에는 오차가 20초인 해시계, 별자리 계측기, 자오선의, 천체 경위등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정확한 관측을 위해 음력을 수정하거나 별자리를 통해 일월식 등을 예측하고 앞으로의 날씨도 점쳤다고 한다. 인도의 세종대왕이 아닐 수 없다.

자이푸르의 또 다른 상징적 건축물인 바람궁전은 후궁들의 궁전.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궁전의 여인들은 이곳에서 궁 바깥의 시장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자이싱 2세의 후손인 프라탑 싱이 건설한 궁전으로 얼핏 보면 힌두신인 크리슈나의 왕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이 테라스형 궁전은 한 사람의 남성을 위해 세상과 단절된 채 평생을 보내야 했던 여성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이자 유일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시장엔 지금도 화려한 빛깔의 실크 사리와 낙타 가죽으로 만든 수공예신발, 장신구 등 매력적인 물건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이푸르는 ‘핑크 시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워낙 자이푸르에 적사암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이런 별명이 붙은 데는 사연이 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이던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인 웨일스의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가 자이푸르를 방문하게 됐다. 당시 영국의 압력을 받은 자이푸르의 마하라자는 환경미화를 이유로 부랴부랴 도시 전체를 핑크색으로 칠했다.

자이푸르의 원주민인 라지푸트족이 핑크색을 환대와 관련된 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착안한 선택이었다.

피지배자인 인도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역에 동원됐지만 이후 ‘핑크 시티’는 관광도시 자이푸르를 일컫는 대명사처럼 돼 버렸다.

자이푸르에 있는 사모드 호텔의 침실. 왕궁을 개조한 헤리티지호텔 체인 중 하나다. 대리석 바닥, 흰벽과 어울리는 라자스탄 전통문양의 컬러풀한 침구, 캐노피 등이 호사스럽다./사진제공 사모드호텔

▼궁전 개조한 호텔…손님을 왕 모시듯▼

특별한 인도여행을 원한다면 ‘마하라자식 여행법’을 권해본다. 관광장소는 물론 자이푸르가 속한 라자스탄. ‘마하라자의 땅’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이 곳에는 자이싱 2세를 비롯, 번성했던 인도 왕국 마하라자들의 흔적이 속속 관광상품으로 변모해 있다.

먼저 델리에서 시작해 자이푸르, 아그라의 골든트라이앵글을 잇는 ‘달리는 궁전(The Palace on Wheels)’이란 초호화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방법이 있다. 일정은 7박 8일 코스로 전통적인 유니폼을 입은 친절한 승무원들이 손님을 왕처럼 떠받든다.

객실 내부는 특급호텔 수준. 객실은 2인용과 4인용이 있으며 모든 객실마다 2개의 욕실과 냉온수 시설, 고급 비품 등이 갖춰져 있다. 또, 남녀 각 한 명의 종업원이 딸려 있어 24시간 룸서비스가 가능하다. 손님들을 위한 편의시설로는 바와 도서실, 레스토랑이 갖춰져 있다. 레스토랑에는 화려한 빛깔의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려 있고 천장에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어 고풍스러운 유럽의 호텔을 연상케한다.

달리는 궁전 외에 로열 오리엔트 (Royal Orient)란 이름의 럭셔리 기차도 있는데 객차 내부는 비슷하다. 다만 로열 오리엔트는 라자스탄을 거쳐 아미다바드, 구자라트를 운행하는 노선이 다를 뿐이다.

요금은 성수기와 비수기에 따라 다르지만 달리는 궁전의 경우 10월에서 3월까지는 1인실 기준, 1박에 485달러 정도다. 12세 이하 어린이는 반액. 이 요금엔 기차삯은 물론 차내에서의 식사비, 정차역 인근의 관광지까지 가는 버스비와 유적 입장료, 문화행사, 뱃놀이 경비 등이 다 포함된 것이다.

마하라자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마하라자가 살던 궁전들을 호텔로 개조한 ‘헤리티지호텔’ 체인에 머무는 것이다. 자이푸르에서 대표적인 헤리티지호텔로는 사모드(samode.com)를 꼽을 수 있다.

헤리티지호텔에서는 체크인하는 순간부터 터번을 두른 종업원들이 그림자처럼 숙박객을 따라다니며 시중 든다. 이곳에 머물면 벨데스크에 문의를 할 일이 별로 없다. 층마다 담당 종업원들이 기둥 뒤 같은 곳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다가 손님이 객실을 나서는 순간 곧바로 뒤를 따르며 손님이 가려고 하는 곳으로 조용히 안내한다. 옛 왕궁을 개조한 호텔에서 미로처럼 얽힌 복도를 걷다가 손님들이 자칫 길을 잃을지도 모르므로 이를 배려한 서비스다.

종업원들은 옛날 마하라자를 영접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손님의 짐을 카트가 아닌 머리에 얹어 나른다. 손님이 원하면 왕들의 목욕물처럼 향유를 부은 물로 욕조를 채워 놓아주기도 한다. 투숙객은 헤리티지호텔 인근 마을에서 쇼핑을 즐기거나 선택관광을 체험할 수 있고 왕궁에 속한 야외영지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 야외영지에는 마하라자가 머물던 스타일 그대로 천막으로 만든 로지가 마련돼 있다. 내부 시설은 역시 호텔 수준. 왕궁을 벗어나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서 하룻밤 머물거나 사막을 여행하는 것도 옛 마하라자의 일상이었다.

밤이 되면 낮 동안의 놀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마하라자를 맞았던 수백년전의 시종들처럼 호텔 종업원들이 소리없이 램프에 불을 밝히고 마중을 나와 손님에 앞서 걸음을 옮긴다.

인도에는 타지마할 외에 볼 것이 없다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여행자이거나 갠지스강을 찾아 헐벗은 성지순례자들을 보며 그 가난에 넋을 잃었던 여행자라면 다음 번 인도여행에서는 마하라자식 여행법을 시도해 볼 만하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인도가 기다리고 있다.

●여행정보

1. 찾아가는 길

자이푸르로 가려면 인도의 델리까지 직항하는 아시아나항공(8시간 30분 소요·02-669-8000)을 이용, 현지 도착 후 자동차로 약 5시간30분 더 이동해야 한다. 일본이나 홍콩을 경유하는 에어인디아(02-752-6310)도 운항되고 있으며 인도 국내에선 제트 에어웨이스, 사하라인디안 에어라인스 등을 이용할 수 있다.

2. 기후

인도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11월∼2월이다. 이 무렵은 건기에 해당해 맑은 날이 이어진다. 다만 일교차가 심해서 한낮에는 30도까지 올라가지만 아침, 저녁으론 약간 서늘한 편이다. 자동차나 기차 안, 호텔에도 냉방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긴 옷을 준비하는 게 현명하다.

3. 기타

잔타르 만타르 천문대의 개장시간은 오전 9시∼ 오후 4시30분. 입장료는 외국인에 한해 5달러다. 카메라 촬영시엔 50루피(약 1달러)를 더 내야 한다. 궁전박물관은 개관시간이 오전 9시30분∼오후 5시이고, 입장료는 150루피, 촬영조건은 동일하다. 자이푸르를 안전하게 여행하려면 공인된 현지 여행사를 통하는 게 현명하다. TCI 여행사(www.tcindia.com) 등이 있다. 인도여행정보는 인도정부 관광국(tourismofindia.com).

이정현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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