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 앞둔 우리시대 인문학자 김우창 교수

  • 입력 2002년 11월 27일 18시 03분


정년퇴임을 앞둔 인문학자 김우창 교수./동아일보 자료사진
정년퇴임을 앞둔 인문학자 김우창 교수./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의 대표적 인문학자로 평가받는 고려대 김우창 교수(영문학)의 정년퇴임(2월)을 맞아 소장 지식인들이 모여 그에 대한 평가 및 그와의 대담을 엮은 책을 발간한다. 12월 말에 발간되는 이 두 권의 책은 각 분야 10명의 지식인이 펼치는 김우창론을 묶은 ‘구체적 보편성으로’(가제) 및 김 교수와 지식인 4명의 대화를 엮은 ‘사유의 길-김우창과의 대화’(생각의 나무). 김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 두 권의 책이 발간되게 된 사연,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학계와 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 등을 들어봤다.

▽ 퇴임논문집 내지 말라 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퇴임 기념논문집을 내자고 해서 말렸다. 기어이 책을 내겠다고 하기에 그렇다면 주제를 가지고 토의하는 방식이 좋겠다고 했다. 퇴직을 계기로 여러 사람이 모여 토의하는 장이 마련됐으면 했다. 말을 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 달라서 말하는 과정을 통해 글로 할 수 없었던 생각이 분명해진다. 사람들의 글을 모아 또 한 권의 책을 만든다는데 그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10명의 지식인이 국문학, 비평, 영문학, 철학, 정치, 미학,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김 교수의 학문을 조명한다)

▽ 인문학 할일을 모른다

인문학의 외적 위기는 인문학 분야에 돈도 학생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과 공부를 해도 취직을 못 한다는 것이지만 내적 위기는 인문과학이 우리 사회에서 할 일을 모른다는 것이다. 인문과학의 기본은 ‘전통’이므로 전통에 대한 반성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공자 주자 퇴계 다산을 읽는 것만이 전통은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 속에 전통의 요소가 많이 있다. 현실사회에 전통적인 사고의 틀이 어떻게 잠복해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살아가는 데 전통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서구적 현대적인 삶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우리 삶의 이면에 가려진 것, 그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 살아가고 생각하는 방식의 다른 한 면을 되찾는 것이다.

▽ 영문학은 단지 외국문학이 아니다

영문학은 단지 외국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문학을 비롯한 서양에 대한 연구는 조선시대의 중국 연구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현재 서양은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물질적 삶까지도 우리를 압도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중국보다 더 중요하다. 영문학도 그런 관점에서 연구하며 한국 사회와 연관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외국 학문의 존재는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는 전통학문도 같은 처지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교수를 평가할 때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실어야 인정해 주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1차적인 문제가 아닌가.

▽창조와 자유에도 제도 있어야

포스트모더니즘은 곧 자유와 창조성, 표현가능성의 확대다. 하지만 ‘중심’에 매달리지 않고 보다 확대된 자유를 누리며 마음대로 살지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윤리적인 관계가 유지돼야 한다. 창조와 자유에도 물질적 사회적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윤리’란 사회에서 여러 사람들간의 관계를 말한다. 내가 늙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 요즘 문화 이벤트성 너무 강하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지만, ‘문화산업’ ‘문화의 시대’라는 말이 거북하다. 문화를 관광자원, 산업자원으로 삼는 것은 잘못됐다. 그것은 통속화된 포스트모더니즘적 표현이다. 문화의 대중화는 좋지만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관계에서 고급화를 보수 반동 부르주아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잘못이다. 요즘의 문화는 이벤트성이 너무 강하다. 너무 일반화 대중화하면서 오락적 산업적 측면으로 치우치고 있다. 문화를 향수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지는 것은 중요하지만 문화는 항구적인 것이다.

▽ 도서관 시설-연구비 늘려야

인문과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도서관 시설과 연구에 필요한 해외 여행비다. 일본 도쿄대에서 연구한 적이 있었는데 도쿄대에서는 교수가 요구하는 책은 다 사준다. 정지용 시인 관련 자료를 찾았더니 동창회보 같은데 썼던 아주 조그만 자료까지도 일본 전국을 뒤져서 찾아줬다. 도서관에는 단순히 책뿐만이 아니라 체계가 필요하다. 전문지식을 활용해 도서를 구입하고 분류, 목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한 분야의 자료는 이 도서관에 다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도서관은 도서관 직원도 적고 도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각자 책을 구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무형 자산의 축적에 투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 학문의 자만심 버리자

우리 역사가 오래됐다고 하는 것과 역사학이 오래됐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철학적인 사유의 전통이 오래됐다는 것과 학문의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도 다르다. 우리는 학문의 역사가 짧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쓸모 없는 자만심을 버리고 연구방법론 등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1950년대 전쟁 중에 대학을 다녔다. 그 이전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혼란기를 거쳤고 1950년대에는 전쟁으로 인해 군대에 간 교수들도 많았다. 그 후에는 표현의 자유도 불충분했다. 나의 시대도 지나갔다. 이제 돈도 많아지고 비로소 학문할 수 있는 토대도 생겼으니 분발해야 한다.

▽ 학문 분화 바람직하지 않다

대학에서 학문이 너무 분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문화로 분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합해 가야 한다. 통합 작용이 없이 전부 분화해 가기만 하는 것은 분파주의이고 근본적으로는 돈의 문제다. 역사의 문제에 대해 반성하려면 한국사 중국사 서양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철학은 한편으로 물리학이나 수학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학부제를 한다면서 외국문학과를 국문과와 분리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움직임에도 물론 반대한다. 통합하면서 분화의 모순을 수용해야 한다.

▽ 일단 좀 놀아야지

퇴임후에는 일단 좀 놀아야 겠다고 생각한다.(웃음) 12월부터 캘리포니아주립 어빈대에서 3개월 동안 겨울학기 강의를 하고 이어 인디애나대에서 1개월간 특별강연을 하기로 했다. 그 강의에 주력하면서 한국의 고전들을 공부하고 싶다.

정리〓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 김우창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 인문학자 중 한 사람인 김우창 교수는 1937년 전남 함평의 명가(名家)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1970, 80년대에 신민당 민권당 등 야당 총재를 지낸 김의택(金義澤)씨.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학원을 거쳐 하버드대에서 미국 문명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거쳐 1975년부터 고려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사회비평가로 활동하면서 격조 높은 논평과 사색으로 주목을 받았다.

국내외 학계는 물론 동료 교수들도 그의 강의를 청강할 정도로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고려대 C, 연세대 Y, H대 B 교수 등 동년배의 석학급 교수들도 “김우창교수야말로 세계적인 학자”라고 평가한다. 저서로는 ‘김우창전집’ 5권 외에 ‘심미적 이성의 탐구’, ‘정치와 삶의 세계’ 등이 있으며 ‘김우창 읽기:구체적 보편성의 모험’(삼인)을 비롯해 그의 사상에 대한 논저들도 이미 여러 편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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