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시티 서울 2002’,거품 문화 드러낸 주인없는 잔치

  • 입력 2002년 10월 3일 18시 52분


전영백 홍익대교수.미술사 미술비평
전영백 홍익대교수.미술사 미술비평
최근 우리 미술계에는 비엔날레 등 국제 행사가 낯설지 않다. 초대 작가나 석학들도 굵직한 이름이 아니면 주목끌기 어렵다.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 2002’에 세계적인 석학 장 보드리야르를 초청한 것도 그런 우리의 높은 지적 욕망과 고양된 미술 담론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지난달 28일 보드리야르가 참석한 가운데 이화여대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Luna′s Flow(달빛 흐름)’은 전시와 함께 현대 미술 담론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심포지엄의 실상은 실망스러웠다.

심포지엄은 내용상 실패일 뿐 아니라 국내 학계 및 미술계의 허점을 드러낸 대외적 망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스컴의 쇄도, 사인을 받으러 단상으로 몰린 대중이라는 거품을 걷어내면 석학 보드리야르를 직접 봤다는 사실과 손에 쥔 그의 글만 남을 뿐이었다.

국제 심포지엄은 외국 학자를 직접 접하는 의미뿐 아니라 그의 이론에 대한 이해와 토론을 통해 주최국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지식의 일방적 전수라면 주최국의 문화 수준이 낮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기에 그런 류의 국제 학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이번 심포지엄은 그런 오점을 남겼다.

문제의 핵심은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포함해 현대 미술의 담론에 익숙한 국내 전문가들의 부재였다. 전문가들이 초대되지 않아 엉뚱한 질문이 많았고, 이런 사태를 중재할만한 지식인들은 참다못해 그 자리를 뜨거나 뒷자리에서 씁쓸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론적 토론을 대치한 ‘팬부대’의 열광, 학계보다 방송이 주도적이었던 기이한 심포지엄이 우리의 ‘거품 문화’를 드러낸 셈이다.

심포지엄에 앞서 열린 ‘미디어시티 서울 2002’의 개막식도 이런 ‘주인없는 잔치’의 분위기를 그대로 풍겼다. 전시를 가능하게 한 행정 당국의 제도적 자본상의 도움을 무시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행정당국의 지나친 주도 때문에 정작 전시에 출품한 작품과 작가들 그리고 기획자들이 뒷전으로 밀린다면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상황이 아니고 무엇인가.

책의 머리말이나 다름없는 미술 전시의 개막에서 전시의 기획과 제작의 창작안(創作案)을 대중에게 알리는 본래의 역할은 무시됐다. 후원측이 너무 앞서는 바람에 일반에게 ‘누가, 무엇을, 왜 만들었는가’보다 ‘자본의 출처가 어디인가’가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분명 작품에 대한 모독이다.

미술 행사에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들을 적재적소에 세우는 것이 바람직한 행정이고 후원이다. 그리고 앞에 나선 전문가는 엘리트주의를 벗어나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전력해야 할 것이다.

이번 ‘미디어시티 서울 2002’는 하나의 미술 행사를 만드는 과정에 창작 진영과 기획팀 그리고 이를 보조하는 행정 당국이 각각 따로 도는 전례를 남겼다. 미술 행사는 적어도 미술계의 주도 하에 이뤄져야 하며 심포지엄 또한 미술 이론가들의 참여가 종용되어야 함은 상식이지 않은가.

전영백 홍익대교수 미술사 미술비평

socioar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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