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내달부터 '식객' 본보연재 허영만씨 인터뷰

  • 입력 2002년 8월 27일 11시 36분


“어깨힘 빼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2일부터 본보에 연재되는 ‘식객’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만화가 허영만씨. 이훈구기자

“어깨힘 빼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2일부터 본보에 연재되는 ‘식객’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만화가 허영만씨. 이훈구기자

"솔직히 잠이 안 온다. 36년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 올라 와 만화계에 입문했다. 데뷔한 때부터 치면 햇수로 29년째다. (만화가로) 할 만큼 하고 누릴 만큼 누렸다고 할 수 있는데 새 작품 시작하면서 이렇게 떨린 적은 처음이다. 잘 해야 겠다는 생각보다 어깨 힘을 어떻게 뺄 것인가, 이게 가장 큰 고민이다."

만화가 허영만. 올해 쉰 다섯의 그는 나이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젊어 보인다. 등산화에 빨간 체크 무늬 남방과 코디한 듯한 빨간 색 베레모. 모자를 벗어 보이니 그제서야 흰 머리가 그의 연륜을 짐작케 한다.

밥 주걱질만 10년 해도 도가 튼다고 하는데, 한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그것도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그 세월을 누렸다면, 분명 대가(大家)라 불릴 만 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가 연(然)'하는 모습이 없다. 프리랜서 특유의 히피 풍(風)은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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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만씨 내달부터 '식객' 본보연재

그의 목소리는 낮다. 톤도 일정해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말수는 적지 않지만, 말재주는 없어 보인다. 속이 깊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말을 받아 적어야 하는' 인터뷰 상대로는 재미없는 사람이다. 2일부터 본보에 실리는 장편 만화 연재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그의 말이 기자에겐 그저 '대가의 겸사(謙辭)'처럼 들렸다.

74년 '집을 찾아서'로 소년한국도서 현상 응모에 당선돼 데뷔한 그에게는 이제 '영원한 현역'이니 '한국 만화의 산 증인'이니 하는 찬사가 무색할 정도다. 히트작을 열거하기도 벅차다. 많은 작품들은 TV 드라마나 극장용 영화로 다시 제작됐다. 한국 만화가로서는 드문 일이다.

이것은 곧 그의 만화가, 기법뿐 아니라 스토리 전개가 탁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는 우리 곁에서 항상 만날 수 있는 생활인들과 세상의 주류에서 밀려난 아웃 사이더들을 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기자는 잠시, 그의 작품과 명성을 떠 올리면서 '잠이 안 온다'는 그의 말이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프로의 직업근성일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이번에 본보에 연재할 만화는 '한국 음식'에 대한 것이다.

"한 작품에 2년 반이라는 기간을 들여 준비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국을 돌아 다니며 취재를 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도 엄청 읽었다."

-어떻게 음식 만화를 그릴 생각을 했나.

"전남 여수가 고향인데, 그 곳은 육해공(陸海空) 음식이 다 있다. 고향을 잘 만나 일찍이 미각훈련이 된 데다 자취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김치까지 담글 줄 아는 실력이 생기더라. 음식에 원래 관심이 많았던 셈이다. 음식 이야기야 글로 써도 되는데, 나는 만화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니 이걸 어떻게 만화로 표현해 볼까 늘 이런 생각이 있었다. 그러다 '맛의 달인' '미스터 초밥왕' 같은 일본 만화를 접하면서 구체적인 영감을 얻었다. 앉아서 그리는 게 아니라 발품을 팔아 취재를 다녀 정보가 있는 만화를 그리면 된다는 생각말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 만화처럼 주인공들의 대결 구도가 아닌, 따뜻하고 속살이 보이는 음식만화를 그려 보이겠다"고 말했다.

-대결 구도도 없이 음식을 놓고 뭘 그렇게 그려 낼 것이 많을까….

"모르는 소리.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특히 한식은 가짓 수는 물론 재료도 수도 없이 많고 조리법도 천차만별이다. 처음엔 김치 한가지만 갖고 그려 보려 했는데 나중에 쌀, 찌개, 반찬에서부터 술에 이르기까지 욕심이 자꾸 생겼다. 그래서 두루두루 한국 음식 전체를 싸 안기로 한거다. 나중엔 그릇 편도 따로 그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웃음)."

-등장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전국을 돌아 다니며 음식 재료를 사고 파는 트럭 행상 젊은 청년이 주인공이고 그가 짝사랑하는 잡지사 여기자, 만화가 지망생 등이 나온다. 뭐니뭐니 해도 '진짜 맛'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장인(匠人)들의 이야기가 스토리의 핵(核)이다."

-예를 들면?

"서울 종로의 한 허름한 홍어집에 취재를 갔는데, 주인 아줌마가 걸물이었다. 흑산도 홍어가 비싸서 칠레 산(産)을 쓴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도 맘에 들었고. 나머지 식재료는 모두 강원도 동서집에서 올라 오는 순 국산을 고집한다고 한다. 지금 막내 아들 훈련시키면서 가업 승계 중인데 처음 6개월은 장보는 일만, 또 6개월은 무채 써는 것만 시켰단다. 깐깐한 엄마 성질 참아내는 아들도 대단해 보였지만, '나 죽어도 이 가게 절대 키우지 마라. 사람 많아지면, 음식 단속 어려워진다'고 엄포 놓는 아줌마 모습을 보면서 진짜 숙연해 졌다. 그런 음식 먹을 때는 먹는 사람도 정성을 들여야 한다. 내 만화에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될거다."

-삼시 세끼 먹는 거, 아무거나 먹으면 어떤가? 음식이라…, 너무 흔한 소재 아닌가?

"미식은 호사가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삶에서 누려야 할 중요한 요소다. 비싸다고 맛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맛이란 건 표준화될 수 없는 아주 주관적인 체험이다. 그러니, 얼마나 무궁무진한 소재가 나오겠는가.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가장 맛있는 음식은 역시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이다. 맛의 장인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다 장인들이다. 비싼 옷 사입는 데는 돈 아까워 하지 않으면서 먹는 데 소홀한 건 겉멋 때문이다."

그는 "서부 총잡이 만화 잘 그리려면 말(馬)하고 총을 잘 그려야 하고, 무사(武士) 만화 잘 그리려면 칼을 잘 그려야 한다. 음식 만화는 음식을 잘 그려야 한다. 그래서 찍은 사진이 수천 컷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그의 그림만 봐도 입에 침이 꼴딱 넘어갈 듯 한 착각이 든다.

그는 "동아일보에 내 만화를 연재한다니, 나로서도 큰 영광이지만, 만화의 지평을 여는 일 같아 후배들에게도 부담이 크다. 각설하고, 어쨌든,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는 그에게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고 물으니 "주인공이 살 집을 마련하러 창신동으로 간다"고 했다. "집을 사러요?" 하고 물으니 '허허'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사는 게 아니고 (사진) 찍으러 간다. 이게 주인공 집이다 하고 매일 쳐다 보면서 그려야 영감이 지속된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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