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유홍준/축구에도 인문정신을

  • 입력 2002년 7월 5일 18시 33분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6월 한 달, 월드컵 축구를 보는 재미로 살았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많을 때는 하루 세 경기나 구경하다보니 나중엔 관전법도 꽤 는 기분이다. 내가 축구를 더욱 깊이 있게 즐기게 된 데에는 해설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컸다. 4-4-2 포진 때 공격과 수비수들이 어떻게 퍼져 나가는가를 해설자의 도움으로 알아챌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눈을 떠가다 보니 처음엔 공이 굴러가는 것만 열심히 좇아가던 내 눈이 어느 새 한 선수가 공을 잡았을 때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는 넓은 시각도 갖게 됐다.

내가 축구해설에 남달리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로 살아가는 내 직업이란 축구와 미술이라는 장르가 다를 뿐 같은 해설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해설을 미술평론과 비교하면서 많은 생각거리를 갖게 되었다. 축구해설의 박진감과 명료성은 부럽기만 했다. 현학적 수사를 일삼는 난해한 현대미술비평가들은 여기에서 배울 점이 정말 많다.

▼공만 있고 문화는 없어▼

반대로 상식적이고 영양가 없는 해설을 들을 때면 혹시 나의 미술비평이 저렇지 않았는가 뒤돌아보게 했다. 공이 어디로 굴러가고 누가 잡아 차는가를 말하는 것은 해설의 기본조건일 뿐이다. 수준 높은 해설은 그 다음의 한 마디에 있다. 마치 박수근의 ‘나목’이라는 작품을 해설하면서 그림 속에 벌거벗은 나무와 아낙네가 그려있다고만 말하고 그친다면 그것을 해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습공격이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은 축구해설가의 안목이다. 그런데 기습공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 “안타깝습니다”라고 탓하지만 말고 “적이 예측할 수 없는 플레이를 하지 않는 한 그 팀은 승리하지 못합니다”라고 한 마디 덧붙인다면 그 해설은 순간 인문학의 수준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그 유명한 추사체를 보통 사람들은 개성적인 글씨 혹은 괴이한 글씨라고 말한다. 그런데 조선 철종 때 한 문장가는 “추사체는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은 글씨”라고 해 글씨를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런 것이 바로 해설과 비평의 미덕이고 그것은 곧 인문정신의 발현이다.

해설에서 그런 인문정신을 가장 멋지게 구사하고 있는 분야는 바둑이다. 박치문 장수영의 바둑해설을 듣다보면 지금 저 분들이 바둑얘기를 하고 있나, 인생을 말하고 있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삶의 은밀한 인식이 살아나곤 한다.

나는 축구해설이라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오노 나나미의 ‘유럽축구 이야기’가 그 좋은 예이며 한국-스페인 경기에 대한 관전기가 국내 어느 신문기사보다 영국 인디펜던트지 글이 더욱 감동적인 것도 내용에 흐르는 인문정신의 고양에 있었던 것이다. 축구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인문정신이 박약한 탓에 월드컵 축구 중계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슬로베니아, 코스타리카, 크로아티아 같은 생소한 나라의 경기를 중계할 때 단 몇 분만이라도 그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있고 면적과 인구, 언어와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며 지도와 함께 그 나라의 자연풍광, 문화유산 등을 보여주었다면 우리의 상식은 높아지고 축구를 보는 재미도 더했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월드컵 개최국이 아니었던가.

경기에 앞서 두 나라 국가(國歌)가 연주될 때 나는 브라질 국가는 어째서 저렇게 흥겹고 터키 국가는 왜 그리 비장감이 감도나 신기해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유럽의 문명국들은 국가 속에 어떤 정신을 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만약 국가가 연주될 때 그 국가의 가사를 한글 자막으로 흘려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우리는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려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면서 정작 우리는 왜 세계를 알 생각조차 하지 않는가.

▼감동이 흐르는 중계 봤으면▼

그 모두가 인문정신의 결여에서 나온 일이다. 축구 자체는 분명 발로 공을 차는 아주 단순한 경기일 뿐이다. 그러나 축구경기를 통해 일어나는 문화 전체는 세계문화사를 압축해 볼 수도 있는, 말할 수 없는 크기와 넓이의 인문정신이 서려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담당하는 것은 해설과 비평의 몫이다. 축구인은 모름지기 바둑과 미술에서 해설과 비평이 해낸 역할을 많이 배워야 했다.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우리는 오직 축구만 생각했을 뿐 축구문화의 인문정신을 너무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유홍준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미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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