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외국계 회사들 "가자 광화문으로"

  • 입력 2002년 6월 27일 16시 00분


랜드리스코리아의 외국인 임원이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전영한기자]
랜드리스코리아의 외국인 임원이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전영한기자]
메릴린치 프라이빗뱅킹팀의 마가렛 홍씨(30)는 광화문살이가 딱 2년이 되어간다. 미국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의 회계법인 등에서 4년간 근무하다 2000년 6월 한국에 들어와 당시 광화문 예금보험공사 건물에 있던 메릴린치(현재 서울파이낸스센터에 소재)에 둥지를 틀었다.

●샌드위치 가게, 다국적 레스토랑 그리고 스타벅스…

그녀가 느끼는 광화문의 가장 큰 변화는 테이크아웃할 수 있는 샌드위치 가게가 늘었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가장 불평하는 것이 혼자 음식을 먹으러 갈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항상 낮 12시가 되면 한국 직원들을 따라 우르르 몰려나갔죠. 하지만 요즘은 샌드위치를 손쉽게 사갖고 와 혼자 끼니를 해결하는 외국 직원들이 늘었어요. 또 외국 손님이 오면 예전에는 갈 곳이 호텔밖에 없었지만 이젠 다국적 메뉴를 선보이는 ‘비즈니스 레스토랑’이 광화문 여기저기에 생겨나 그곳으로 많이 가죠.”

신문로 세안빌딩에 사무실을 둔 주한유럽위원회 대표부에서 6년간 근무한 영국 출신 존 사가(31)는 “광화문에 커피체인점 스타벅스가 들어선 것에서 국제화를 느낀다”고 말했다. 스타벅스, 다국적 레스토랑, 샌드위치 가게…. 광화문의 외국인들은 어찌보면 사소한 것에서 국제화를 느끼고 있었다. “세계화는 어느 지역에 가서든 동일한 것을 향유할 수 있다는 동시(同時)성에서 체감된다”는 사회학자들의 분석이 맞는 것일까.

●외국세가 드센 광화문

사가씨는 광화문이 ‘다국적 공간’으로 거듭나는 가장 큰 원인을 다국적 기업 증가에서 찾았다. 스타벅스 국내 계약사인 신세계 박찬영 홍보부장은 “서울파이낸스센터(SFC)가 들어서면서 외국계 기업의 입주가 늘고 유동인구가 늘어나 스타벅스 입점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실제 광화문 일대를 둘러보면 최근 2년 사이에 상당수의 대형빌딩이 외국계에 점령당했다. 광화문 사거리를 중심으로 SFC를 비롯해 세안, 광화문, 흥국생명, 교보생명, 이마빌딩 등 대형빌딩의 외국계기업 점유율은 50% 이상이며 외국자본이 직접 사들인 인근 대형빌딩도 6곳이나 된다(지도 참조). 세계적인 투자은행, 컨설팅펌, 각국의 상업은행 및 보험사 등 금융기관이 집중돼 있다.

기업부동산 종합컨설팅업체인 BHP코리아 이수정 과장은 “정부 부처와 대사관 등이 몰려 있어 외국계 금융기관과 컨설팅펌 등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던 지역이었다”며 “최근 외국 금융기관의 진출이 급격히 늘어난 데다가 새로운 빌딩이 들어서면서 입주 기업이 다른 지역보다 늘고 있다”고 말했다. 흔히 금융 중심가로 알려진 여의도에는 국내 금융기관만이 남아 있고 외국계 금융기관은 점차 광화문으로 본거지를 옮기는 추세다. 강남 테헤란로에 외국계 고급 소비재기업과 정보통신기업 및 외국 중소기업이 밀집해 있다면 광화문 일대는 외국계 금융 및 지식기반 업체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지도 참조). 끼리끼리 모여 발생하는 시너지효과와 정보교환도 무시할 수 없다. 메릴린치는 한때 강남 스타타워빌딩과 SFC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동업자들이 많은 광화문으로 왔고 컨설팅펌인 딜로이트컨설팅도 최근 ‘강남 외도’를 접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세계의 중심’ 광화문?

SFC내 한 외국계 컨설팅펌에 근무 중인 미국인 마이클 로글(30)이 근무했던 도시는 런던 파리 도쿄 홍콩 등 10여곳이다. 96년 광화문에 입성한 뒤 그의 눈에 비친 이곳은 다른 국제도시와 어떻게 다를까.

“우선 발전할 수 있다는 예감이 듭니다. 뉴욕과 런던처럼 광화문의 사람들은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놀라운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와 중국 상하이, 문화적인 감성이 살아 있다는 점에는 파리,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뉴욕이나 싱가포르와 비슷하다는 게 저의 느낌이에요. 외국인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던 시각도 바뀌고 있고요.”

그에게 있어 광화문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오전 6∼7시다.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해 텅빈 세종로 일대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현대적 빌딩의 숲에서 근엄한 이순신 장군 동상과 광화문 등 전통적인 문화유산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렛 홍씨도 “삭막한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강남 지역은 서구 도시와 비슷해 외국인들이 별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며 “광화문에서는 골목 골목 숨어 있는 허름한 음식점을 찾는 것이 재미있고 청와대와 세종문화회관 등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월드컵 기간 중 광화문을 휩쓴 붉은 물결에 대해 인터뷰한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전 세계에 잊혀지지 않을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광화문, 국제 중심으로 이제 ‘걸음마’

부동산투자 및 종합컨설팅업체인 프로퍼티 솔루션의 홍콩 출신 리오 시유는 광화문의 국제화를 인정하면서도 ‘아직 갈 길은 멀다’고 말했다.

“외국계 자본이 이 일대 빌딩을 잠식하면서 국제 기준에 맞게 리노베이션되고 있고 다국적 기업에 맞는 서비스가 도입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가 근무했던 홍콩의 란카이퐁과 비교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진정한 국제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란카이퐁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네팔 등 세계 각국의 식당이 있어요. 간판만 ‘네팔 식당’이 아니라 주인 및 종업원들이 모두 네팔 사람이죠.”

또 란카이퐁처럼 국제 기준에 맞는 임대형태, 계약, 임대료 계산, 빌딩 관리법 등도 한국이 서둘러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관광도시로 개발하는 것보다 국제 비즈니스 중심도시로 만드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이 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화문에서 월드컵 기간 내내 붉은 악마 틈에 끼어 어깨를 함께 했던 외국인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광화문의 새로운 ‘실핏줄’로 녹아들면서 세종로 사거리의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