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주류특집]'야쿠르트 아줌마' 만 21년 왕고참 신현례씨

  • 입력 2002년 5월 22일 17시 23분


오전 8시40분. 서울 성동구 금호동 한국야쿠르트 직매소.

‘야쿠르트 모자’에 검정 바지, 노란 상의, 흰 운동화를 신은 27명의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냉장 물류창고에서 바삐 손을 놀린다. 한 입에 털어 넣는 조그만 야쿠르트부터 고급형과 떠먹는 것 등을 골고루 챙겨 노랗고 네모난 ‘야쿠르트 가방’에 담는다.

“22년 전에는 이것 한 종류밖에 없었는데….”

이곳 직매소에서 ‘회장님’으로 통하는 왕고참 야쿠르트 아줌마 신현례씨(49·사진)가 작은 야쿠르트 병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금호동은 돌멩이 위치까지 알아요〓신씨는 81년 5월부터 이 지역 배달을 맡아왔다.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때 야쿠르트 먹던 동네 아이들이 이제 다들 어른이 돼 결혼했다고 연락도 오고 그래요.”

신씨는 금호동 일대에 모르는 집이 없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사람들이 가끔씩 야쿠르트 영업소를 통해 신씨에게 연락을 해오기도 한다. 동네의 어느 가정의 좋은 일 나쁜 일, 각종 대소사도 놓치는 법이 없다.

“22년 다녀 보세요. 남의 일이 어디 남의 일 같나.”

재작년에는 배달 갔다가 그 집 가족 중 백혈병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병원비에 보태라고 10만원을 건넸다. 환자는 결국 숨졌다.

“올해 4월 우리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그 때 10만원 받은 집에서 축하한다고 예식장에 찾아 오셨더라고요.”

각 집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보니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종종 ‘명 중매쟁이’로 이름을 날리기도 한다. 부산에서 약 20년 야쿠르트를 배달한 ‘야쿠르트 아줌마’는 120여쌍의 결혼을 중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로 수해가 났을 때 서울 동작구에서는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배달 일을 하면서 간선도로 지하보도 등의 상태를 점검하는 일도 했다.

통상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담당 지역을 잘 바꾸지 않는다. ‘안면 장사’의 성격도 있어서 담당 아줌마가 바뀌면 매출이 약 20% 떨어지기 때문.

오전 8시반경. 한국야쿠르트 서울 금호동 직매소의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전날 들어온 각종 '야쿠르트 시리즈'를 냉장 창고에서 꺼내느라 분주하다.

▽야쿠르트로 아이들 키우고 먹고살았죠〓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남편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해 돈을 벌어야 했다.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새벽같이 일을 나가는 건 물론이고 낮에도 청소도 해보고 노트에 스프링 끼우는 부업도 해봤다. 그러다 야쿠르트 아줌마를 졸랐다. ‘나도 하게 해달라’고…. 야쿠르트 아줌마는 “보통 회사 면접 가듯이 깔끔하게 하고 가라”고 조언해줬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야쿠르트에 면접을 하러 갔다.

취업이 되긴 했는데 정작 한달 동안 배달은 못해봤다. 지금은 실습기간이 3,4일 밖에 안되고 실습수당도 나오지만 한달 내내 무보수로 실습을 하고서야 정식 야쿠르트 아줌마가 될 수 있었다. 한참 많이 돌릴 때는 하루에 1500개씩 돌렸다. 95년에는 ‘판매왕’으로 뽑혀 경자동차 티코를 상으로 받기도 했다.

“아이들 다 대학 보내고 결혼도 시켰어요. 지난달 결혼한 아들에게는 우리 집 바로 위층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해 줬는걸요.”

자랑스러움이 비치는 얼굴로 신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들 며느리 둘 다 치과의사예요.”

자녀들은 “이제 배달 일은 그만하시라”고 말리지만 신씨는 아직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래도 달동네가 정겹죠〓신씨는 손으로 미는 수레가 아니라 배터리로 가는 전동 카트를 사용한다. 경사가 심한 곳을 주로 다니거나 동선이 긴 지역을 담당하는 야쿠르트 아줌마는 전동 카트를 지급받는다.

“2년 전인가 전동 수레 시제품이 나왔을 때는 도중에 서버려서 고생한 적이 있어요. 이게 무거워서 힘으로 끌려면 정말 힘들거든요. 올해 새로 나온 것은 말썽 없이 잘 다니네요.”

재개발로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지만 신씨의 담당구역은 아직도 시장과 주택가다.

“많이 변했죠. 예전엔 전부 달동네였는데. 잘 살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정겨움은 덜해요.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점심시간이면 모두 동네어귀에 모여 같이 식사를 했거든요. 저도 같이 했고요.”

예전에는 집에 있는 사람도 많아 배달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눌 일이 많았는데 언제부터인지 맞벌이 가정이 많아지면서 문 밖의 야쿠르트 가방에 그냥 넣어두고 오는 집이 더 많아졌다.9시50분경.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각자의 지역으로 흩어진다. 금호동 금남시장에서 3군데 야쿠르트를 돌리고 나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에게 굳이 ‘윌’ 하나를 쥐어주고 신씨는 전동 카트를 몰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오후 6시경이면 신씨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한국야쿠르트는 소매점에서 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야쿠르트 아줌마들을 통해서 판매한다. 71년 47명으로 시작한 야쿠르트 아줌마는 75년 1000명을 넘어섰고 98년 1만명을 돌파했다. 2000년까지 야쿠르트 아줌마로 활동한 사람을 다 합하면 17만여명. 이중 10년 이상 근무했거나 해온 장기 근속자도 2000명이 넘는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 야쿠르트 아줌마

한국야쿠르트는 소매점에서 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야쿠르트 아줌마들을 통해서 판매한다. 71년 47명으로 시작한 야쿠르트 아줌마는 75년 1000명을 넘어섰고 98년 1만명을 돌파했다. 2000년까지 야쿠르트 아줌마로 활동한 사람을 다 합하면 17만여명. 이중 10년 이상 근무했거나 해온 장기 근속자도 2000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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