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박범신/TV, 마침내 책을 말하다

  • 입력 2002년 5월 17일 18시 24분


KBS의 프로그램 중 가장 공익성이 강한 프로그램은 아마 ‘TV, 책을 말하다’일 것이다. 본래 매주 목요일 오후 10시대에 방송하던 것을 요즘은 자정쯤에 하고 있는데 월드컵 프로그램들 때문에 자정 밖으로 밀려났지만 월드컵이 끝나고 나면 소위 TV의 황금시간대라고 불리는 10시대로 원 위치하리라고 본다. 월드컵이 국가적인 큰 행사이므로 예정대로 원 위치하기만 한다면 잠시 밀려난 걸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시청률 벗고 ´공익´속으로▼

한동안 우리의 공중파 3사 TV프로그램 중 책에 관련된 프로는 전무했다. 연예인들이 단골로 등장하는 오락성 짙은 프로그램은 ‘교양물’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날로 늘어나고 최루성 드라마들도 다투어 방영시간대가 늘어났지만 문화, 그 중에서도 책 관련 프로그램은 몇 년 사이에 있던 것도 슬그머니 종적을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의 내로라 하는 공영방송들이 시청률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책 관련 프로그램을 10년씩 계속해서 제작, 방영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TV, 책을 말하다’가 편성됐다. 마치 불모의 땅에 오아시스 하나가 불쑥 생겨난 것 같았다. ‘TV, 책을 말하다’ 첫 방송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점에 크게 놀라고 또 감동했다. 첫째는 ‘TV, 책을 말하다’가 50여분이나 되는 긴 프로인데 TV의 황금시간대인 오후 10시대에 편성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0시대는 경쟁사들이 사세를 걸다시피 하고 드라마로 승부를 겨루는 시간이다. 아무리 공영방송이라지만 우리의 방송환경과 현실은 시청률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동안 문화관련 프로그램들이 자정이 넘은 시간대로 밀려나 편성됐던 것은 편성제작자들이 이런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서였다. 이런 현실 속엔 머리로는 이상주의적 공익성을 요구하면서도 눈으로는 자극적인 재미만 좇는 시청자들의 이중성도 포함된다. 그런데 KBS는 이런 현실을 과감히 떨쳐버리는 참된 ‘편성의 용기’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내가 놀라고 감동한 것은 ‘TV, 책을 말하다’의 질적 수준이었다. 보통 문화 관련 프로그램을 배정 받은 PD들은 어차피 잘 안될 거라는 식의 패배주의, 혹은 보신주의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나 ‘TV, 책을 말하다’는 책 속의 화자들을 어떻게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보이도록 할 것인지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내용도 알차고 ‘그림’으로도 재미있었다. 첫 회 방송을 보고 나는 ‘바보상자’라고 우리가 불러왔던 TV를 향해 혼자 박수를 쳤다.

요즘은 MBC의 ‘느낌표’ 프로그램 중 책읽기 코너가 장안의 화제를 몰고 왔다. 오락성이 너무 짙지 않느냐는 일부 지식인의 불만소리를 듣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는 ‘재미있게’ 전달하려는 그 의도를 폄하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눈에 좀 거슬렸던 것은 제한된 시간에 책을 가져갈 만큼 가져가라고 해서 이 책 저 책 고르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이 서가의 책을 모조리 쓸어 담는 식의 분별 없는 장면 정도다. 그 장면에서 책으로 밥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약간 모멸감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자연적인 문제다. ‘TV, 책을 말하다’가 있으니 ‘느낌표’는 또 그들의 컨셉트대로 하면 된다고 본다.

활자문화의 원리는 책 속의 문자라는 기호들을 눈으로 보다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의미체계로 바꾸는 데 있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보다 좀더 힘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활자문화는 현상보다 현상의 배후에 담긴 정체성 또는 진실을 우리에게 일러줄 뿐만 아니라 생각하게 해준다.

▼책 속에 희망이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듣고 나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 책을 읽지 않고 살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책은 우리 정신의 재생산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준다. 그런 점에서 영상문화가 파죽지세로 뻗어나가는 시대에 살고있으나 책을 읽지 않는 국민에겐 희망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KBS가 ‘TV, 책을 말하다’로 공영방송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이 세웠다고 칭찬하고 싶은 것도 그런 확신 때문이다.

책 속엔 무한한 ‘그림’들이 내재되어 있다. 책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영상’도 저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 KBS의 ‘TV, 책을 말하다’와 MBC의 ‘느낌표’ 제작진에게 감사드린다. 민영방송이라고 해서 방송의 공익성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SBS가 앞으로 만들지 모를, 새로운 컨셉트의 책 프로그램을 기대해 본다.

박범신 소설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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