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국속의 외국' 외국인학교의 한국학생들

  • 입력 2002년 4월 11일 14시 04분


필립 함(12)에게는 썩 괜찮은 부활절 방학(3월28일~4월7일)이었다. 방학 시작 전 받은 3학기 성적표에서 여덟 과목 모두 최고 등급인 S(Superior)를 받아 엄마의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려 놓았다. 사촌형 스티븐과 서해안 여행도 다녀왔고 학교 북 페어에서 사두었던 영어 소설책도 실컷 읽었다.

필립은 경기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서울국제학교(SIS) 6학년 A반 학생이다. 태어난 곳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국명은 함재용. 미국과 한국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는 필립은 돌이 갓 지나서 유학을 마친 한국인 부모를 따라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길지만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편하다. SIS에는 필립처럼 이중 국적이거나 외국생활을 오래한 한국인 학생이 10명 중 8명쯤 된다.

필립의 영어 실력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줄곧 서울서 살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책꽂이에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등 원서가 빼곡이 꽂혀 있고 매일 읽는 신문도 코리아 헤럴드다.

필립을 영어도 잘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엄마는 집에서 영어를 함께 쓰게 했고 필립이 네 살때 외국인 유치원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ECLC(Early Childhood Learning Center)에 보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엄마는 한국 학교로 보낼 것인가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 SIS로 결정했다.

필립은 학교 생활을 무척 즐거워한다. 오전 8시에 시작하는 수업을 들으려면 7시 15분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집 앞에서 스쿨버스를 타야 하지만 하루 4, 5시간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수업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밴드니 체육이니 ‘노는’ 시간이다. 필립은 밴드 시간에 트럼펫을 분다. 체육 시간엔 농구 축구 배드민턴 인라인스케이트 하키 수영 등 다양한 운동을 배운다. ‘Booster Day’로 불리는 토요일에는 수업은 없지만 학교에서 구성한 체육프로그램에 자율적으로 참여해 하루종일 학교 친구들과 운동한다. 매주 두 번 집에서 트럼펫 개인 레슨을 받고 엄마와 한국어 학습지를 공부하는 것 외에 과외 공부는 없다.

학년이 올라가도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또다른 필립과 에릭 챙 형제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서울외국인학교(SFS) 8학년과 10학년생이다. 필립과 에릭은 각각 16세와 14세로 미국 뉴욕과 뉴저지에서 태어나 필립은 초등학교 1학년, 에릭은 유치원 때 펀드매니저인 한국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왔다.

형제는 오후3시면 수업이 끝난다. 하지만 형 필립은 오후 8시반, 에릭은 5시반이나 돼야 집에 온다. 필립은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 뮤지컬 ‘코러스 라인’을 연습한다. 지난 가을엔 셰익스피어의 ‘헛소동’ 공연 준비로 바빴다. 뮤지컬 연습이 끝나면 2시간 동안 월요일엔 재즈밴드, 화요일엔 성경공부, 수요일엔 신문반 활동, 목요일엔 보충수업을 한다. 금요일은 실컷 노는 날이다. 학교 친구들과 신촌 압구정동 등을 돌며 영화도 보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스티커 사진도 찍는다. 토요일엔 온종일 친구들과 엉켜 농구니 배구니 ‘피터지게’ 운동한다. 동생 에릭은 월요일과 수요일엔 농구, 화요일엔 교지 편집, 목요일은 재즈밴드, 금요일엔 종교 지도자 양성 모임, 토요일엔 교회 찬양팀에서 드럼을 친다.

2개월 남짓 되는 여름 방학에 형제는 네팔로 선교여행을 떠나거나 미국으로 희곡쓰기 캠프를 간다. 이밖에도 매년 1주일씩 ‘디스커버리 위크’에 케냐 몽골 뉴질랜드 등으로 견학을 다녀오고 쉬는 날에는 다른 나라의 국제학교 학생들 간 배구시합이나 밴드 연주를 하러 일본 싱가포르 등을 바쁘게 오고 간다. 강아지를 맹도견(盲導犬)으로 훈련시켜 시각장애인에게 제공하고 북한 어린이 돕기 자선 공연을 하는 등 봉사활동도 열심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엄마 눈에는 중고등학생인 형제가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리지 않는 게 가끔은 불안하다. 학교에서는 조금만 잘해도 크게 칭찬해 주는 걸 알기 때문에 우등상을 받아와도 영 미덥지 않아 가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희 학년 전체 일등이 누구니?”

그러면 필립과 에릭은 정색을 한다.

“엄마, 그런 말이 어딨어. 수잔은 수학을 잘하고 데이빗은 야구를 잘한다, 이렇게 말하는게 옳은 거야.”

미국식 교육을 받고 있는 형제는 한국에 살면서 가치관의 차이를 종종 느낀다.

한번은 한국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가 SFS 밴드반 아이들과 합주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아이의 연주기량은 뛰어났지만 지도 교사는 칭찬은 커녕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밴드의 목적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 그 아이가 자꾸 튀려고 했기 때문이다.

에릭은 지난해 여름 국내 시민단체에서 주최한 국토순례 캠프에 참여했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원이 4명인 텐트에 10명이 자야 하는 상황을 에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강사는 몇 번이나 거절하는 에릭에게 “아이들 앞에서 영어로 스피치를 해보라”고 강요했다. 식사시간에 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이리저리 새치기하며 닭다리를 먼저 집어드는 친구들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올 가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에릭은 지난해 여름 엄마와 함께 미국 사립고교 몇 곳을 돌며 입학설명을 들었다. 그때 한국에서 몰려온 학부모들이 “SSAT(고입수능시험) 성적이 얼마면 되느냐”고 이구동성으로 캐묻는 것을 보고는 정말 답답했다.

“학교는 SSAT 성적만으로 가는 게 아니거든요.”

필립 형제가 한국적인 맥락, 가치관에 당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형제는 미국인의 가치와 정서를 가진 미국 시민을 키워내는 것이 교육 목표인 외국인 학교에서 교육받고 있기 때문이다. 필립과 에릭은 스스로를 “나는 미국인”이라고 말한다. 미국사와 미국 정부론은 자세히 배웠지만 한국사는 세계사의 일부로 배웠을 뿐이다. 제2외국어에는 한국어도 들어 있지만 두 형제 모두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스페인어를 택했다. 부활절 방학은 있지만 어린이 날에는 수업을 한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을 읽고 CNN을 들으며 NBC 시트콤 ‘프렌즈’를 본다.

친구 관계도 그렇다. 사실 학년이 높아질수록 금발에 파란 눈의 미국 아이들과는 점차 사이가 멀어진다. 그렇다고 동네 한국인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방과 후 시내를 쏘다니며 놀 때, 온누리 교회에서 영어 예배를 볼 때 곁에는 외국인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 뿐이다. 추수감사절에 아버지가 직장 동료의 가족들을 초대해도 함께 온 또래 아이들과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외국인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거의 100% 해외 대학으로 진학한다. 요즘엔 중학교 졸업 후 아예 미국 사립고교로 조기 유학하는 경우도 늘었다. 아무래도 미국 사립고교의 명문 대학 진학률이 높고 교육 환경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릭도 올 9월 미국 동부 뉴햄프셔주의 명문 사립고교 세인트 폴로 유학을 떠난다. 한국에서 지원하는 학생들을 위한 정원이 따로 있었는데 경쟁률이 100대1이었다.

한국 내 외국인 학교에서 오래 근무하려는 교사들은 많지 않다. 도서관 공연장 체육시설 등 교육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시골 오지에서 서울로 유학하듯 이곳 학생들도 미국으로 일찌감치 유학길에 오른다.

필립과 에릭 형제에게는 ‘장민석’ ‘장우석’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다. 하지만 이름을 지어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만 그렇게 불러주실 뿐이다. 형제는 ‘필립 챙’과 ‘에릭 챙’으로 살고 있다.

▼외국인학교 학생의 성장코드

- 씨밀락과 아이소밀: 씨밀락은 미국의 대표적인 신생아용 조제 우유 브랜드. 한국서 자란 아이들도 성장 발육에 좋다는 씨밀락을 먹고 큰 아이들이 많다.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들은 두유인 아이소밀을 먹는다.

- 브리오 나무 기차: 브리오(Brio)는 스웨덴의 세계적인 원목 장난감 브랜드. 기차가 다니는 조립식 철로를 3,4개씩 상자에 넣어 파는데 학생들이 철로를 사 모아 누가 길게 잇나 경쟁을 벌일 정도로 인기가 있다.

- ECLC: 서울 한남동 하얏트 호텔 옆에 있는 몬테소리 외국인 유치원. 외국인 뿐 아니라 자녀가 한국어와 영어, 이중언어를 구사하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줄을 잇는 곳이다.

- Band와 PE(Physical Education): 외국인 학교 생활의 절반을 차지하는 게 ‘밴드’로 불리는 음악 교육과 ‘PE(체육 교육)’다. 학생들은 개인기보다 팀워크를 강조하는 밴드와 PE 활동을 통해 책임감과 협동심, 끈기를 배운다.

- Thumbs Up(칭찬위주의 교육): 학생들은 조그마한 선행에도 교사로부터 엄지 손가락을 곧추 세우며 외치는 “네가 최고야!”라는 칭찬을 듣는다. Thumbs Up 카드를 세 장 받은 학생은 반 친구들에게 피자로 한 턱 낸다.

- 런치 카드: 점심은 카페테리아를 이용한다. 학생들 가방에는 학원 수강증 대신 점심을 사먹을 수 있는 선불 카드가 빠짐없이 들어있다. 초등학생의 경우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지만 고교생은 학교 밖에서 자장면 등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 슬립오버(Sleep Over):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주말이나 방학 때 친구집에서 하루 이틀 자고 오는 것이 허락된다. 부모끼리 아는 친구집이어야 하며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 온누리 교회: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은 온누리 교회 영어 예배시간을 이용한다. 한국어가 서투른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 장벽 때문에 학교 밖에서도 한국 학교 학생들과 어울리는 일은 드물다.

- 프렌즈: ‘남자셋 여자셋’ ‘뉴 논스톱’ 등 국내 시트콤의 교과서가 되는 미국 NBC의 대표적인 시트콤. 한국 학교 학생들이 시트콤 ‘뉴 논스톱’의 장나라 조인성 박경림을 얘기하듯 외국인 학교 학생들은 ‘프렌즈’의 매튜 페리와 제니퍼 애니스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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