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서울간판 읽기']"밝고 고운 우리말 간판 보기 힘드네

  • 입력 2001년 10월 8일 18시 25분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인 간판. 간판의 언어와 이미지는 도시를 드러내고 상징하는 언어로도 읽힌다. 따라서 서울의 거리는 간판들이 언어와 이미지로 싸움을 벌이는 한판 전쟁터다. 건물 외벽을 뒤덮을 정도의 거대한 간판들,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외면한 채 제멋대로인 디자인, 자극적인 언어로 오로지 ‘튀는 데만’ 급급한 상호들…. 전문가들은 간판은 우리의 언어생활과 문화를 그대로 나타내주는 지표라고 말한다. 조현신 교수(41·여·국민대 테크노디자인 대학원)와 간판디자이너 김영배씨(42·부산정보대 겸임교수) 등 간판전문가 2명과 함께 한글날을 맞아 서울거리에서 새로이 늘어나고 있는 간판들을 중심으로 ‘간판 읽기’를 시도해봤다. 이들은 “간판은 도시의 환경을 드러내는 중요한 결정 요소”라며 “특히 왜곡된 언어와 선정성이 가득한 서울의 간판들은 도시인의 이기주의와 과시욕, 속물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신촌

▽무조건 튀어라〓‘젊음의 거리’를 상징하는 신촌은 젊은 세대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톡톡 튀는 상호와 디자인의 간판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지역.

‘골때리네 노래방’ ‘똥값 세일’ ‘취중천국’ ‘돈돈 보이네’ ‘오직 성공세대일 뿐’ ‘묻지마 노래방’ ‘형 어디가’ ‘돼지가 꼬추장에 빠진 날’ ‘이판저판 고기판’ ‘위풍 닭닭’ ‘악을 써라 노래방’ 등등.

‘무조건 튀고 보자’는 업주들의 의도가 간판 곳곳에 묻어 있다. 이런 형태의 문구는 신촌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대학 주변 유흥가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경향. 이들은 또 몇 개월을 주기로 더욱더 자극적인 새 상호로 ‘버전 업’되는 것도 특징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튀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성향에 ‘단골’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어떻게든 손님의 눈길을 끌어들이려는 업주들의 노력이 결합된 결과물로 해석한다.

조 교수는 “‘낙지대학 떡볶이과’나 ‘위풍닭닭’ 정도만 해도 언어 확장과 다의적인 해석 차원에서 봐줄 수 있지만 ‘도끼로 이마까’나 ‘똥값 세일’ ‘이러다가 망하지’ 같은 상호들은 극단으로 치닫고 될 대로 돼라 식인 사회 정서의 부정적인 면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담동

▽간결한 게 좋다〓부유층의 세련된 취향을 반영하는 강남구 청담동 거리는 외래어가 간판을 지배하고 있다. 상호도 ‘Goshen’ ‘Xian’ ‘Bar Sha’ ‘Le Pain’처럼 원어로 적힌 경우가 대부분이다.으로 우리말간판은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신촌을 비롯한 시내 유흥가 간판들이 자극적인 상호와 외형으로 큰 목소리 내기에 열을 올린다면 ‘한국의 베벌리힐스’로 불리는 청담동은 품격과 간결을 지향한다.

김 교수는 “불특정다수의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제한된 소수의 고객들만 상대로 영업을 하는 특성상 간판도 요란하지 않고 상호도 한두 글자 정도로 간결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외국어를 그대로 사용한 간판들에서 문화적 정체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또 간판만 봐서는 업종구분이 힘든 것도 특징. ‘Bong’이나 ‘On The Rock’ 등은 건물이나 간판만 봐서는 중국음식점임을 알아차릴 수 없다. 조 교수도 “과장되고 선정적인 간판이 지배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세련된 면을 보이고 있지만 한글 간판이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지나친 서구 지향성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인사동

▽우리말의 운치〓‘모깃불에 달 끄스릴라’ ‘깔아놓은 멍석 놀고간들 어떠리’ ‘오 자네왔는가’ ‘아빠 어렸을 적에’ ‘학교종이 땡땡땡’ ‘꽃을 던지고 싶다’ ‘아라가야’ ‘학은 둥지를 틀고’ ‘뜰 앞의 잣나무’.

전통문화가 숨쉬는 거리답게 간판마다 나름대로 ‘의미’를 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한자어가 점차 쇠퇴하고 순우리말의 형용사와 동사를 사용한 서술형 상호가 늘어나는 추세다.

시민단체 선정 우수간판

서술형의 우리말 상호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외래어 일변도에서 벗어나 우리말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해석된다.

이는 또 비단 인사동만이 아니라 90년대 이후 간판의 흐름을 지배하는 한 경향. 조 교수는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길어지는 경향도 있지만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구성원들마다 ‘할말’이 많아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최근 들어 인사동에도 ‘아트 사이드’ ‘스타벅스 커피숍’처럼 ‘강남 스타일’의 외래 간판들이 늘어나면서 지역의 정체성을 흐려놓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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