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88세에 대담집 낸 원로 평론가 박용구옹

  • 입력 2001년 9월 4일 18시 50분


◇"남북분단의 슬픔 뮤지컬로 만들고 싶소"

“6·25전쟁과 분단은 우리 민족 문화의 허리를 뚝 끊은 빙하의 깊은 균열, 크레바스(Crevasse)를 만들었어요. 북한으로 건너간 예술인은 이념에 쫓기다 정신이 고갈됐고, 졸지에 성주(城主)가 된 남쪽의 예술인들은 성에 안주한 채 기름기만 끼였습니다.”

지난달 30일 미수(米壽·88세)를 맞은 원로 평론가 박용구 옹. 그는 최근 이념 분쟁으로 두 동강난 우리 예술사는 물론 세계 예술의 흐름을 조망한 대담집 ‘20세기 예술의 세계’(지식산업사)를 출간했다.

3일 오후 서울 세검정 자택에서 만난 그는 나이를 잊은 듯 여전한 날카로움과 여유 있는 웃음으로 예술과 세상에 대한 평론을 멈추지 않는 ‘영원한 청년’이었다.

그는 무용평론가 장광열과의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의 머리말에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담력도 추진력도 모자라는 나는 눈이나 옳게 뜨고 보자는 생각으로 세월을 살았다’고 60여 년에 걸친 자신의 평론 인생을 정리했다.

“1926년 평양고보에 재학하고 있는데 광주학생운동이 터져 반일 독서회 사건에 연루돼 고문 받고 퇴학당했습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난 독립투사가 될 만한 체력과 인내력, 용기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지요. 그 부끄러움이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강렬하게 옮겨졌습니다.”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박 옹은 일본 잡지 ‘음악평론사’ 기자로 활동하다 1940년 5월 동아일보에 ‘하얼빈 악신(樂信)’이란 제목의 음악 기사를 기고하면서 국내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48년 최초의 음악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낸 것을 시작으로 무용 연극 영화 건축 방송 등 전방위에 걸친 평론가로,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등을 제작한 뮤지컬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이 책에는 특히 작곡가 김순남, 문인 임화, 무용가 최승희, 화가 이쾌대 등 월북했거나 작고한 예술계 거장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들이 담겨 있다.

“당시 해방 공간은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념과 예술혼이 함께 부글부글 끓던 용광로와 같았어요. 대립도 있었지만 47년 배재학당에서 열린 성악가의 독창회에서 김순남의 ‘산유화’를 듣다 감흥에 못 이겨 좌우익 예술인들이 함께 모여 술잔을 나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는 또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는 얼굴이 네모난 중성적인 이미지였지만 무대에만 서면 빛이 나는 미인이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40년 전부터 물구나무서기로 몸을 단련하고 욕심을 비운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는 그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남북 분단의 슬픔을 다룬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며 아직 식지 않은 창작의지를 드러냈다.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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