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에서 남극까지]'20세 대학생 최재웅' 271일간 대장정 출발

  • 입력 2001년 1월 30일 19시 31분


◇"영하40도 혹한뚫고 드디어 우리는 해냈다"◇

“위아 히어 나우 . 위 메이드 잇! 파이널리 위 메이드 잇!!”(We are here now. We made it! Finally we made it!!!. 마침내 도착했다. 드디어 우리가 해내고 만거야)

침묵을 깬 것은 프랑스에서 온 르노 리처드(25)였 쉬어 터진 목소리로 그가 소리를 질렀을 때 내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두꺼운 선글라스 때문에 볼 수는 없었지만 7명의 친구들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2000년 12월31일 오후 8시(현지시간)였다. 저 멀리 수백미터 떨어져 외롭게 꽂혀있는 남극점 장대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크게 보였다. 눈부신 지평선. 그 위에 낮게 떠서 날카로운 금빛 화살을 머리위로 쏘아대던 태양. 영하 40도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동상과 피로에 지쳤던 우리들이었건만 어디서 힘이 솟구쳤는지 뛰다시피 극점을 향해 걸었다. 가슴이 벅찼다.

도착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10여명의 남극 아문센 기지 직원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마침내 남극점 장대에 손을 올려놓았다.

처음에 탐험 참여를 권했던 아버지의 얼굴과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며 핀잔을 주었던 친구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2000년 4월 5일에 시작한 271일간의 대장정. 이번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지만 또한 가장 보람찬 여행이었다. 소풍가듯 ‘재미있는 모험’ 정도로 시작한 이번 여행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킬 줄 누가 알았을까? 미성년자로서의 마지막 한 해였던 2000년의 이 사건은 올해부터 성인으로서 살아갈 내게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경험한 작고도 소중한 기억들을 동아일보 독자들과 함께 하고 싶다.

■여행의 시작: 99년 11월 어느 날 아버지(최승훈·崔承勳·46·연세대 의대 교수)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불쑥 인터넷에서 프린트한 종이 한 장을 내미셨다.

‘극에서 극으로 2000(Pole to Pole 2000)’

영국인 탐험가 마틴 윌리엄스씨(55)가 운영하는 어드벤처 네트워크 인터내셔널사(ANI)가 2000년 4월1일에 북극점을 출발, 이듬해 1월1일 남극점에 도착할 ‘세계 청년탐험대’를 뽑는다는 것이었다. 북극점에서부터 캐나다 미국 멕시코 과테말라 에콰도르 페루 칠레 등의 미 대륙 국가들을 가로질러 남극점까지 오직 자전거 카누 스키 등 무동력 기구만으로 횡단한 다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돌아다니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내겐 그야말로 눈이 동그래질만한 제안이었다.

컴퓨터 영어 스키는 일단 남한테 지지 않을 만한 자신이 있었다.20kg짜리 배낭을 메고 하루 8시간씩 걸을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쯤은 ‘쇳덩이라도 삼킬 수 있다’는 내 나이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참가비 10만달러(1억2600만원)를 어떻게든 구해야만 했다. 밤을 새면서 인터넷을 뒤지며 내 뜻을 담은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한달 뒤, 정말 운이 좋게도 인터넷 증권업체 ‘쉐르파(www.sherpa.co.kr)’에서 전액 후원을 약속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한번 일이 풀리니 막힐 것이 없었다. 나는 평범한 대학생에서 일약 예비 탐험가로 탈바꿈했다.

■훈련캠프에서: 2000년 2월28일 캐나다 밴쿠버 인근 산악도시. 우리가 모인 곳은 이름도 재미있는 ‘100마일의 집(100 Mile House)’이었다. 나를 포함해 7개국에서 모인 젊은이는 모두 8명. 환경생물학을 전공한 철인 3종경기 선수인 메르세데스 로자우어(27·여·아르헨티나), 야생탐사 가이드인 딜런 스펜서(23·캐나다), 남태평양 섬들을 탐험했던 와세다대 3년생 이시카와 나오키(21·일본) 등 모두가 쟁쟁한 여행프로들이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삶의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섞여 생활한다는 것은 또래 친구들만 알고 지내던 내게 처음에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아무 때나 코를 심하게 푸는 르노가 가뜩이나 날카로워진 내 신경을 더욱 자극했고 5분이상 샤워하는 것은 물낭비라며 내가 목욕할 때마다 짜증을 내는 데블린(23·남아공)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하지만 공동의 목표를 가진 우리들은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해발 1800m의 캐리보산맥에서 하루 20km씩 전진하는 막바지 훈련이 끝나갈 무렵 북극점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쉽게 서로의 마음을 열어갔다. 6주간의 예비훈련은 만만치 않았다. 20kg이 넘는 배낭에 스키를 꽂은 채 산과 계곡을 들짐승처럼 뛰어다녔다. 영하 15도의 추위에 벌벌 떨면서 영하 40도라는 극한을 이겨낼수 있을까 두려움이 일었다.

■북극점 출발: 4월1일. 훈련캠프를 떠나 북극점에서 700여km 떨어진 북극점 여행의 전초기지인 레졸루트 베이(Resolute Bay). 당초 예정대로라면 이날 비행기가 이곳에서 우리를 싣고 북극점에 내려주게 되어 있었지만 바람이 심해 4일째 뜨지 못했다.

마침내 날씨가 갠 4월5일 북극점에 첫 발을 내딛었다. 9개월 대장정의 첫발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방한복 밖의 온도는 영하 35도. 하지만 내 가슴은 36.5도의 뜨거운 피로 달아올랐다. 8명을 처음 베이스캠프였던 레졸루트 베이까지 이끌어줄 가이드는 탐험가 로리 덱스터씨(57·캐나다)가 맡았다.

첫날부터 시련이 닥쳤다. 엄청난 눈보라 때문에 꼬박 하루를 텐트 안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것. 이튿날 여정을 시작한 우리 앞에는 3,4m 높이 얼음 덩어리들이 곳곳에 가로막혀 있었다. 배낭에 날을 달아 썰매로 만든 배낭썰매에 실은 40kg의 짐들이 허리로 끌고 다닐 땐 모르겠더니 얼음덩어리 위로 올리려니 왜 그렇게 무거운지.

악조건속에서 첫 일주일간 88km를 걸었다. 강풍으로 텐트 지지대가 부러지고 얼음 덩어리를 타넘다 스키장비들이 부서지는 가운데서도 하루 10시간 이상 나아가고 4시간 정도 잠을 잤다.

그렇게 한달동안 600km를 걸어 우리는 마침내 레졸루트 베이로 다시 돌아왔다. 비슷한 시기 우리 팀과 같은 탐험대를 만들어 떠났던 두 팀중 한 팀은 중간에 조난을 당해 죽다 살았고 또다른 한 팀은 대원 한명의 부상으로 모두 중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걱정 한켠에 솟구치는 자신감을 감출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영웅대접을 받았다.여기서부터는 우리 탐험대 대장이자 이 탐험의 계획자인 마틴이 우리를 이끌었다.

■미국과 캐나다: 5월12일부터 캐나다 북부 뎀프스터(Dempster) 고속도로에서 미대륙 횡단여행이 시작됐다. 이제부터는 하루 이동거리를 팀원 8명이 나눠 각자 맡은 거리만큼 자전거로 이동한 뒤 캠핑차량으로 뒤따라온 다음 주자와 교대하는 방식으로 이동한다.

1인당 이동거리는 하루 60∼80km. 당시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탐험대장 마틴이 ‘작은 걸음이 모여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취지하에 ‘변화를 위한 도전(Challenge to change)’이라는 모토로 만든 다양한 NGO활동. 우리는 횡단 중간중간 소도시에서 지구를 지키자는 내용의 강연을 했고 주요 청중들이었던 10대 청소년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7월7일에는 말로만 듣던 하버드 대학에서도 강연을 했다. 대원들은 각종 환경관련 행사 참여에 굉장한 열정을 보였다. 하이디 하우먼스(20·여·미국)는 “화학물질 때문에 지구가 균형을 잃어간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고 꼭 NGO활동이 아니더라도 길거리에 버려진 작은 쓰레기들을 지나치지 않았다.

이들 속에서 나도 조금씩 변해갔다. 도전정신만으로 꽉 차있던 내 머리 속으로 봉사정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봉사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법도 배웠다.

일주일뒤에는 뉴욕에서 노숙자들을 위해 집을 지워주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아무 대가없이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다음날 대원들이 모두 쉬는 날이었지만 나는 혼자 나가 노숙자들의 일을 더 도와주고 돌아왔다. 뭔지 모를 이 느낌.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았으면 놀랄 일이다.

<정리〓최호원기자>bes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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