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월街의 자금인맥…그들이 가진 파괴력

  • 입력 2000년 7월 28일 18시 50분


▼'미국의 경제 지배자들'/히로세 다카시 지음/동방미디어/박승오 옮김/255쪽/8000원▼

IMF사태 이후 우리 국민은 몰라 보게 유식해졌다. “국제적인 자본이동을 선도하는 것은 헤지펀드이고, 이의 대부격인 인물은 유태계의 조지 소로스란다.” “월스트리트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투자은행이란 것이 있는데, 이 자들은 기민한 정보력으로 한탕할 투기건을 쪽집게 처럼 잡아낸다더라.” 등등.

혹자는 이를 가리켜 IMF사태로 비싼 수업료를 낸 대신에 드디어 지식축적형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며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퀴즈문제를 잘 풀게 되었다고 실력이 붙은 것은 아니다. 정작 투기꾼들이 어떤 수법으로 횡재를 하고 있는지, 이들에게 자금을 대주는 자들, 즉 투기꾼을 고용하는 자들은 기실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일본인 시사평론가 히로세 다카시가 쓴 ‘미국의 경제 지배자들’. 저자는 미국의 역대 대재벌 가문의 유산 상속자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가문과 정략 결혼으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이 저변의 돈줄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들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저자는 재미있는 추정을 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의 철도부호인 밴더빌트가 1877년 사망하며 남긴 유산은 1억 달러였다. 그의 상속자들이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유산 전액을 월가에 투자했다고 해도 123년이 경과된 오늘날 약 6조8600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자손들의 재산관리가 시원치않아 상당부분 탕진한 결과 10% 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무려 6860억 달러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7배를 웃도는 자금이다.

유력 경제학자들 중에도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해 비판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콜럼비아대의 바그와티교수는 월가의 금융 인맥이 워싱턴의 정가를 주무르고 있다고 지적했고, MIT의 폴 크루그먼은 러시아나 홍콩의 위기사태 때 일부 언론이 헤지펀드를 거들었다는 심증론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에 의존해서 월가의 자금인맥이 벗겨지기를 기대할 수 는 없다. 이들에겐 엄밀한 실증분석이라는 전공의 덫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반면 히로세 다카시는 비전공자만이 누릴 수 있는 논설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한국에서나 시대착오적으로 재벌과 가벌의 위세가 판치고 있겠거니 생각해온 우리에게 지적인 쇼크를 가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자본시장은 완전히 자유화되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는지도 모른다. 외국자본의 영향권 하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두고두고 고민해야 할 과제이지만, 어찌됐건 이들이 가진 파괴력의 일단을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찬근(인천대 무역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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