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남진우의 시집 '타오르는 책'

  • 입력 2000년 7월 7일 18시 51분


남진우의 세번째 시집 ‘타오르는 책’(문학과지성사)은 여전히 ‘피의 넝쿨 가득히 환한 죽음을 꽃피우고’(정오) 있다. 특징적인 것은 그 죽음이 ‘책’에 대한 사유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때로 이 ‘책’에는 모래나 먼지, 담쟁이덩굴이나 달팽이, 안개나 피, 새나 항아리 따위의 옷이 입혀지기도 한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타오르는 책)라는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에게 세계는 책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책은 ‘불’로 상징되는 신성한 권위를 지녔으되 지금은 죽음을 재생산해내는 ‘차가운’ 암세포에 불과하다. 신전이었으되 공동묘지 혹은 폐허에 불과할 뿐이다. 이때 숭배의 대상이었던 ‘불’은 파괴와 몰락을 부르는 독으로 작용한다.

기존의 문장에 덧씌워지는 새로운 문장, 쌓인 책더미 위에 다시 쌓이는 새로운 책들. 이러한 유적(遺蹟)으로서의 반복은 운명적으로, 타인의 문장 속에서 자신의 문장을 지워가는 ‘책의 죽음’을 부른다.

시인은 이미 책이 무용한 아니 끔찍할 정도로 유해한, 책의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그러기에 더욱 그 죽음은, 몸밖으로 흘러 다니는 ‘붙잡을 수 없는/기호들’로, ‘들리지 않는/보이지 않는 속삭임 혹은 빛’(환)으로 시집 도처에서 떠돌고 있다. 이를테면 덩굴을 내밀어 몸을 휘감는 나무이기도 했다가, 흥건한 피에 젖어있기도 하다가, 사각의 관(棺) 속에서 부우옇게 망령의 안개로 흐느적거리며 솟아오르기도 한다.

러한 책은 시인의 구원이자, 시인의 몰락을 예감케 하는 징후이다. 이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잃어버린 근원이며 상실해버린 동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목하자. 이처럼 책들 속에서 책 자체의 죽음을 사유할 때, 그는 저자(시인)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으며 현재와 현실 너머 미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는 것을. 때문에 그 죽음은 책의 유효성과 생명력이 상실되는 그 시점에서 책의 절대적 엄숙성에 도달하려는 제의(祭儀)적 죽음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제의적 죽음이기에 시인은 그토록 준엄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책들을 불태우면 자기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그토록 자욱하고 자욱하게, 습습하고 습습하게, 죽음에 침윤되는 페이지들로 읽혀져야만 하는 그 구체적인 삶의 무늬와 결이. 그리고 하루하루가 모래와 먼지, 안개와 피, 죽음과 책에 뒤덮여 있어야만 하는 시인의 그 섬세한 내면이. 이미 책 안에서 책 밖을 사유하고자 하는 시인에게, 이미 저자(시인)의 죽음 속에서 세계의 죽음을 진단하고자 하는 시인에게 던지는 나의 우문(愚問)일까?

‘판권란에 찍힌 저자의 인장 같은’ 붉은 ‘별 하나’가 우리들 ‘이마에 툭 떨어진’다(저무는 거리에서). 타오르는 조등(弔燈)이다.

정 끝 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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