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소비자파워]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궈가는 소비자보호

  • 입력 2000년 2월 21일 19시 42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남동쪽으로 25㎞ 떨어진 튜레세구(區)의 인구는 3만9000명. 구청 별관 1층에 있는 소비자상담소의 상담원 비르기타 클레멘슨이 전화상담 중이었다.

“독일에서 일제 미쓰비시 승용차 란세르를 샀는데 이곳에서 수리해주지 않는단 말이죠? 무상수리기간이 2년이니 충분히 무료서비스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사항은 조사해서 해결해드리겠습니다.”

클레멘슨이 국립소비자청에 전화를 걸어 이 문제의 조언을 구하는 사이에 ‘여행사가 광고와 달리 9박10일의 이집트여행 중 주요유적지 관광을 빼먹었는데 환불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 E메일이 들어왔다. 그는 곧 소비자고발원에 사건을 접수시키겠다고 답신했다.

‘소비자의 천국’ 스웨덴에는 지방자치단체마다 소비자상담소가 있어 상담을 해준다. 280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250여개가 이런 식으로 소비자상담원을 두고 있다.

소비자문제가 결코 억센 여성단체나 전투적 소비자단체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럴듯한 나라치고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소비자 입장에서 소비자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튜레세구에서도 클레멘슨을 비롯해 5명의 상담원이 상품정보 제공부터 소비자 피해, 가정경제문제에 대한 상담까지 구민의 요구에 응하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소비자보호업무는 역시 소비자 피해 구제. 지역 소비자상담소의 상담 뒤에 소비자고발원에서 처리한다. 이렇게 해서 소비자고발원에서 한 해에 처리하는 소비자 피해 구제 사례는 7000여건이나 된다.

소비자고발원 베리트 스트롬 튠 기획관리실장은 “고발원의 결정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68%는 결정에 따른다”며 “이에 따르지 않는 기업은 매스컴에 공표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고발원이 소비자 피해와 관련한 분쟁 해결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 국립소비자청은 소비자문제의 예방과 교육을 담당한다. 소비자가 질좋은 상품을 값싸게 살 수 있도록 품질비교시험을 실시해 그 결과를 알려주고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하도록 식품가격과 융자비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기본. 여기에 요즘 관심을 더해가는 소비자안전문제도 빠질 수 없다. 국립소비자청은 PVC 가소제에서 환경호르몬과 만성독성이 검출되자 당장 환경부에 제안해 유아용 PVC 장난감에 가소제를 넣지 못하도록 지난해 7월부터 법으로 금지시키기도 했다.

직접 기업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소비자의 고발이 없더라도 기업의 불공정거래로 소비자의 불만을 사거나 피해가 우려될 때 국립소비자청이 나서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어린이에 대한 광고. 미국 시리얼회사인 퀘이커사가 얼마 전 TV 만화시간대에 제품을 광고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회사에서는 성인대상 광고였다고 강변했지만 국립소비자청은 이 회사를 시장재판소에 제소했다. 만화시간대에 이같은 광고를 방영함으로써 TV프로와 광고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자극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공정거래와 소비자보호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스웨덴 소비자정책의 이념은 시장재판소에서 이 두 문제를 동시에 다루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기업과 소비자 사이의 문제일 경우 국립소비자청(소비자 옴부즈맨)을 통해 재판소로 가지만, 기업간의 문제일 경우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선다. 공정거래위는 얼마 전 SAS항공사가 군소 항공사와의 연결편 항로 협약을 거부한 것과 관련해 불공정행위로 시장재판소에 제소했다.

스테판 로랑 재판장은 “시장재판소는 기업이 공정하게 거래하는 가운데 모든 소비자가 상품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부당한 광고에 의해 오도되거나 피해보지 않도록 기준을 정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 각 지방에 설치된 소비자상담소와 비슷한 곳이 영국의 시민상담소. 전국 어디서나 2000여개 시민상담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소비자문제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의 불편에 대해 상담해준다. 심지어 직업이 없을 경우 직업을 구해주거나 빚을 많이 져 파산상태에 이른 사람은 채권은행과 연결해 채무 해결방안을 중재해준다.

이와 별도로 법률적 제도적 측면에서 소비자보호와 공정거래업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으로 공정거래청이 있다. 허위 과장광고를 시정하고 기업과 소비자가 맺은 계약이 일방적으로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돼 있을 때 중재하기도 한다.

노르웨이 각 지방에서 소비자보호업무를 담당하는 곳은 스웨덴의 국립소비자청과 비슷한 성격의 소비자위원회 18개 지부. 수도권지부는 오슬로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역시 소비자문제뿐만 아니라 가정문제 상담까지 한다.

“왜 가정문제까지 관여하느냐”고 묻자 톰 볼스타트 소장은 소비자정책이 곧 사회보장정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비자문제는 기본생활과 관련이 깊다. 소비자정책은 개인이 자원을 최적으로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 최근 병에 걸려 주택융자상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직자가 도움을 청해왔다. 상담소에서는 그의 동거녀 및 채권은행의 중재에 나섰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실직자는 집을 잃게 되고 동거녀와의 관계까지 끝날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타격이지만 사회적 손실도 크다. 차라리 상담소에서 중재해 해결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비용이 싸게 먹힌다.”

▼ 스웨덴 시장재판소 ▼

스웨덴에서 상거래와 소비자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특별법원이 시장재판소다. 소비자나 기업에는 제소권이 없고, 소비자옴부즈맨이 미리 중재나 조정을 하고 이에 실패할 경우 제소하게 된다.

의장을 포함해 법조인 3명과 기업인 및 학계대표 등 모두 7명으로 구성되는데 4명 이상이 참석해야 재판이 열린다.

재판은 단심(單審)으로 항소할 수 없으며 벌금형에 처하거나 사건내용을 공표할 수 있다.

▼ 인터뷰/한국소비자보호원 허승원장 ▼

한국소비자보호원의 한해 예산은 123억원. 인원도 240명이나 된다. 소비생활과 관련한 조사 및 시험검사와 소비자불만 등을 처리한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국립소비자청과 소비자고발원, 지방자치단체 소비자상담소의 일 등을 뭉뚱그려 맡고 있는 셈.

허승(許昇) 한국소비자보호원장은 “모든 분야의 소비자문제를 이렇게 한 기관에서 다루는 예는 세계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방 소비자들은 마땅히 피해구제를 요청할 곳이 없는데….

“지방에서도 상담 요청이 접수되고 있다. 피부에 닿는 소비자업무를 위해선 지부를 둘 필요가 있으나 예산 등 여건이 아직 부족하다.”

―피해상담과 구제는 민간단체에 맡기고 소보원은 시험검사나 정책개발 등에 주력해야 하는 것 아닌지….

“선진국에서도 피해구제는 대부분 정부가 담당한다. 물론 소보원은 민간단체가 의뢰한 시험검사, 유전자조작식품 판별기법이나 자동차 급발진사고 원인 등의 연구에도 주력하고 있다.”

―앞으로의 중점사업은….

“전자상거래 시대의 소비자구제, 수입농작물의 안전성 확보 등이다. 이미 손 댄 법률 의료 보험 등 전문서비스분야의 소비자보호에도 한층 노력하겠다.”

▼ 스웨덴 소비자옴부즈맨 악셀 에들링 ▼

스웨덴은 1809년 6월 옴부즈맨 관련 기구를 창설한 이래 ‘헌법에 의한 행정부 컨트롤’이란 정신 아래 이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이 제도가 행정부의 효율성 생산성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자 각 분야에서 이 제도를 도입했는데 ‘소비자 옴부즈맨’도 그 중 하나.

악셀 에들링 소비자 옴부즈맨은 “우리는 행정부로부터 독립해 있다. 오직 소비자 입장에서 일할 뿐”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1976년 국립소비자청과 통합돼 청장을 겸임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 국립소비자청은 소비자정책을 시행하는 곳이다. 소비자가 왜곡된 광고나 불공정한 거래로부터 기만당하지 않도록 시장을 감시하고 소비자에게 상품선택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품질도 비교 시험한다.”

-소비자 옴부즈맨은 무엇을 하는가.

“위험한 상품을 판매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명령 또는 기업이 이를 수거해 수리토록 하는 리콜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시장재판소에 회부한다. 품질검사에서 심각한 제품결함이나 광고에 명시되지 않은 사실이 나타나면 직접 제조업자에게 문제 해결을 요구하거나 거래를 금지시킬 수도 있다.”

<스톡홀름·오슬로·런던〓김진경·하종대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