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맞이 행사를 보고]박범신/마침내 밝힌 희망

  • 입력 1999년 12월 31일 19시 05분


20세기가 어둠에 묻혀 있다.

반복과 갈등과 야만적 살생의 역사도 끝이다. 합리적 서구사회가 주도해 온 비합리적 약육강식의 20세기 문화를 ‘우주의 중심’인 광화문에 우리가 묻는다. 문명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확대 재생산해온 욕망의 무절제한 펌프질 또한 그렇다.

자정을 5분여 앞두고 광화문 일대의 불이 일제히 소등되고 마침내 서해 변산반도에서 채취해 횃불대에서 가물거리던 20세기의 마지막 광채조차 꺼지고 만 순간, 어디선가 지난 천년을 조상하는 진혼의 노랫가락이 솟아오른다.

▼어둠은 진혼곡에 묻고▼

겨우 이것이었던가.

그토록 숨가쁘고 치열했던 20세기 끝에 유일하게 묻히지 않고 살아남은 게 진혼의 노래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유정한 이별의 노래는 단순한 진혼을 넘어 하나의 통절한 침묵이다. 묻을 건 묻고, 용서할 건 용서하고, 잊지말아야 할 것은 잊지 말자는 것이다. 한국인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극상의 절제가 그 속에 깃들여 있다. 우리는 역사의 천년과 개인적 삶의 다난한 ‘천년’을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세계의 시간이 모두 ‘밀레니엄 옴팔로스’ 광화문 네거리의 36m 대형 시계추에 쏜살같이 들어와 박힌다. 너와 내가 없고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없다.

충만된 열(10)로부터 유일한 자존인 하나(1)까지, 더불어 함께 목청껏 카운트다운할 때 우리는 단지 천년의 경계선을 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의 층위를 넘어 전혀 다른 새 문화를 탄생시킨다. 그것은 새천년준비위원장 이어령씨의 말처럼 전쟁에서 평화로, 변방의식에서 우주중심이라는 의식으로, 물질주의에서 생명중심으로 가는 문화이다.

마침내 2000.

2000이라는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면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한다. 수십명의 요정들이 향로를 흔들고 새천년의 새로운 문화를 짊어질 2000명의 젊은이들이 신공항 활주로를 비상하며 전국 50개 산부인과 병원으로 연결된 인터넷 통신망을 통해 생생한 새 생명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욕망의 대폭발이었던 20세기가 아니라 감성의 대폭발이 벌어질 새천년의 시작이다.

▼새로운 문명의 탄생▼

천년의 눈동자 500대의 디지털카드섹션은 정보화시대의 중심을 뚫고 가려는 우리의 의지가 담겨 있고 2000개의 시루떡은 더불어 살려는 우리의 맹세가 얹혀 있다. 그리고 해가 뜬다. 2000만 촉광의 화려한 조명탄이 지구의 어둠을 한순간 환히 밝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인가.

방송사의 대형축하쇼가 진행되는 시간, 돌아오는 어둠 속에서 나는 기어이 스스로 묻고 만다. 새천년에 거는 간절한 소망이 얼마나 이루어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저 화려한 상징들은 너무도 우리 현실에서 먼, 추상은 아닌가. 물론 추상일지라도 꿈꾸는 건 좋은 일이다. 나는 그 자정에서 우리의 ‘결핍’과 ‘꿈’을 보았다. 눈물겹게.

박범신(작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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