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정옥자

  • 입력 1999년 6월 11일 19시 36분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천막이동 도서관을 전전하며 좋은 책 나쁜 책을 가릴 안목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시작된 ‘남독’은 중학교 때 문학 쪽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학교도서실의 문학책들을 허기증에 걸린 듯이 읽어치우고 난 뒤 친구들의 언니나 오빠의 서가에서 하루 한 권씩 빌려 읽었다. 이 때 현대문학의 고전들이라고 하는 이광수 김동리 김동인 황순원 등의 소설들을 모조리 읽었다.

그러나 이 무렵 가장 매력적인 것은 시였다. 시를 읊고 있노라면 찬란한 신록 같은 희열이 가슴 가득히 차 오르곤 하였다. 신석정의 ‘빙하(氷河)’를 비롯,몇 권의 초간본 시집들을 문학소녀의 징표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도 알알이 떠오르는 주옥같은 시구들은 삭막한 도시의 삶에 찌든 내 마음에 청량제가 되고 있다.

대학에서 역사학도의 길을 택한 나는 역사적 사실로 가득 찬 역사책들을 읽었다. 그러나 역사책들은 ‘재미없음’ 그 자체였다. 감미로운 감성시대의 마감이자 고된 이성훈련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세계문학전집이 일본어 중역이 아니고 직역으로 비로소 출판돼 전공서적을 학습하는 틈틈이 문학전집을 빼어 읽으며 위안을 삼았다.

대학 졸업 후 몇 년의 공백 끝에 동양고전들을 원전으로 읽으면서 비로소 마음의 양식을 찾은 느낌이었다. 특히 ‘논어’의 짧은 경구들은 씹으면 씹을수록 쫄깃쫄깃한 맛이 났다.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부터 읽는 방법을 계속하다보니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저절로 줄줄 외게 되었다. 이 때에 ‘정독’의 의미를 터득하였다.

뒤이어 사마천의 ‘사기’와 ‘열전’을 읽으면서 지식의 홍수속에 지혜가 부족한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 후 ‘장자’를 읽으면서 또 한 번 정신의 고양을 경험하였다. 그 때까지 집착하던 사물의 허상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중년에 학문의 세계에 돌아온 후 조선시대 사상사라는 전공 특성상 수많은 문집들을 읽게 되었다. 저절로 조선시대 지성들인 선비들의 삶과 정신에 폭 젖어들었다. 문집을 통해 그들과 대화하며 그 고고한 품격과 맑음의 미학에 매료되기도 했다.

방학 때면 소설들을 읽었다. 문학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역사연구에 필수적인 직관과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 또 팍팍해지는 문장을 살찌우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는 ‘홍어’를 읽었다. 나이 들수록 유년의 삶이 생생해지는 것은 어쩐 일일까? 나의 유년의 뜰로 돌아가기 위해 타인의 유년의 뜰을 들여다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사방이 새하얀 설산의 산골마을에서 이 풍진 세상의 먼지를 털어 내고 온 기분이다.

정옥자<서울대교수·규장각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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