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금도 『깎아주세요』 흥정…정식재판 청구 러시

  • 입력 1999년 4월 14일 19시 51분


‘벌금도 흥정대상인가.’

지난달초 주택건설촉진법위반 혐의로 약식기소돼 법원으로부터 5백만원의 벌금을 선고받은 L씨(41·건축사무소 대표)는 최근 서울지법 동부지원에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범죄의 정도에 비해 벌금액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된데다 건축경기의 위축으로 수입이 격감해 5백만원도 큰 부담이었던 것.

최근 L씨처럼 피고인을 법정에 부르지 않고 문서로만 재판하는 약식재판의 벌금형 액수에 불복해 법원에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피고인들이 크게 늘고 있다. IMF시대에 한 푼이라도 아끼자는 ‘절약정신’이 발동한데다 97년부터 약식재판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하더라도 원심보다 더 무거운 형량을 선고할 수 없다는 ‘불이익 변경금지의 원칙’이 법률로 보장됐기 때문.

서울지법 동부지원의 경우 지난해초 매달 30∼40건에 불과하던 정식재판 청구건수가 같은해 하반기부터 80여건으로 늘었다. 이중 절반 가량이 단순히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벌금을 깎아달라는 사람들이라는 게 법원직원들의 얘기. 같은 기간 약식재판 건수가 6.7%가량 늘어난 사실에 비춰볼 때 눈에 띄는 증가세다.

서울지법 산하 각 지원과 서울지법 본원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법원에 따르면 97년 85만1천3백70건이던 약식재판 건수는 지난해 96만1천2백16건으로 12.9%가량 늘었다. 반면 약식선고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한 건수는 1만4천9백60건에서 2만3천6건으로 늘어 53.8%가 증가했다.

이처럼 ‘정식재판 청구러시’에 따라 판사들의 업무량도 대폭 늘었다. 문서로만 재판하는 약식재판의 경우 하루 수십건씩 처리할 수 있지만 피고인을 일일이 불러 의견을 들어야 하는 정식재판은 약식재판보다 적어도 3∼5배 이상 업무량이 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식재판 청구 접수여부를 놓고 법원직원들과 피고인들 사이에 실랑이도 잦다. 범죄내용으로 볼 때 정식재판을 청구하더라도 벌금액수가 깎일 것 같지 않은 사건의 경우 직원들이 청구를 만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지법 동부지원의 한 판사는 “혐의사실에 뚜렷한 변화가 없다면 99% 이상이 원심대로 선고되는 게 상례”라며 “단순히 벌금을 깎아달라는 취지의 정식재판 청구라면 아예 내지 않는 게 낫다”고 말했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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