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이태원 『모국서 명성 뽐낼거예요』

  • 입력 1999년 3월 9일 19시 26분


97년 봄, ‘명성황후’의 연출자 윤호진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명성황후’의 프리마돈나 윤석화를 교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95년부터 한국 뮤지컬계를 휩쓸다시피 한 명성황후의 뉴욕공연을 불과 서너달 앞둔 시점이었다.

“동양 뮤지컬로는 최초의 브로드웨이 입성작인데…. 과연 윤석화가 현지 팬들에게도 뜨거운 감동을 안겨줄 수 있을까.” 결국 그는 성악을 제대로 전공한 ‘디바’(뛰어난 여자 성악가·이탈리아어로 여신)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태원(33).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2년째 공연중인‘왕과나’의 여주인공 티안 역으로 열연중이던 그에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국에서 동양 최초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뮤지컬을 준비중이래. 당신 한복입고 한국노래 부르는 것이 소원이라며….”

줄리어드음대 석사출신의 가슴은 방망이질쳤다. 그는 당장 듣도 보도 못했던 극단 ‘에이콤’(대표 윤호진)에 오디션을 자청했다. ‘왕과 나’의 공연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도 특급우편 편으로 보냈다.

한창 잘나가던 이민 1.5세대 뮤지컬배우가 느꼈던, 뮤지컬의 본거지에서도 응어리 처럼 남아있던 ‘광대의 갈증’을 해갈하려는 염원은 이루어졌다. 뉴욕공연은 대성공을 거뒀고 평단은 작품의 완성도와 함께 이태원의 명징하면서도 풍부한 성량을 높이 평가했다.

지금 이태원은 한달째 한국에서 연습 중이다. 19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다섯번째 막을 올리는 ‘명성황후’에 나서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김원정과의 더블캐스팅이 아니라 자신만의 ‘원톱시스템’이다.

‘명성황후’의 프리마돈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그랬듯 이태원이 밟아온 길도 자못 드라마틱하다.

15살 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그의 꿈은 파일럿. 미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떨어졌다. 이후 어릴 때부터 가스펠로 익혀온 노래솜씨를 눈여겨보던 주변사람이 노래공부할 것을 권했고 줄리어드음대에 원서를 내 단박에 합격, 대학원까지 장학금 받고 다녔다. 그후 95년 ‘줄리어드 들어간 식’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의 오디션을 신청했고 98년까지 주연을 맡게 된다.

“33년 짧은 인생이지만 극복하고 도전해야할 ‘장애물’투성이였어요. 브로드웨이에서의 인종차별은 물론, 이민 1.5세대로서 겪는 한국에서의 문화적 차이도 마찬가지죠.”

97년 뉴욕타임스는 이태원의 스토리를 한면에 걸쳐 소개하면서 “그는 한몸에 담고 있는 한미양국의 문화적 토양을 시너지효과로 연결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소개했다.

‘열정덩어리’인 그에게는 척박한 고국의 뮤지컬환경은 또다른 도전의 대상이다.

“뮤지컬 인프라가 너무 형편없어요. 교육체계도 ‘노가다’식이고. 한국스태프들이 바닥부터 익힌 실력으로 그만큼 해내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래서 그는 대기실에서 남모르게 목청을 돋우고있는 후배들을 보면 한번이라도 발성교정을 해주고 브로드웨이에서 전수받은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려 한다.

그간 계속 수정에 보강을 거듭한 ‘명성황후’는 이번 공연에서도 달라진다. 우선 12m 간격의 이동식 이층무대. 일본낭인의 시해음모를 하단에 펼쳐놓고 조선 왕궁의 평화로운 풍경을 위층에 배치, 두 무대를 최대한 격리시켜 관객들로 하여금 “어휴, 저런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르고…”하는 안타까움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 비용과 기술상의 애로에도 불구하고 연출자 윤호진의 ‘고집’으로 시도된다.

단순하다는 지적을 받은 일본낭인의 황후시해 장면은 민비의 대사를 길고 극적으로 처리하고 홍계훈의 무과급제 장면도 화려하게 바꾼다. 02―761―0300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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