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병용 방침 논란]이현복/『효과적어 불편만 줄것』

  • 입력 1999년 2월 10일 19시 25분


《정부의 갑작스러운 한자병용방침은 학계에 격렬한 논란을 다시 불러 일으키고 있다. 찬성론자들은 한자병기를 통해 국민의 언어문자생활이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론자들은 자주독립국가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퇴행적 탁상행정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반대 입장★

공용문서와 도로명을 한문글자로 병기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한마디로 잘못된 일이며 시의에 맞지 않는 발상이다. 경제난국이다 아이엠에프다 하여 온 국민이 신음하고 있는 이 판국에 한자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하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시점에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하겠다는 논리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통문화의 계승이고, 둘째는 동양문화권의 유대이다.

우선 한자를 써야 전통문화가 계승된다는 논리는 허구일 뿐이다. 전통문화는 한문글자를 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잘 계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은 옛날 영어로 씌어 있어 현대 영국인이 쉽게 읽을 수는 없지만 오늘날 그의 작품은 현대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애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자로 쓰인 조선왕조실록은 남북한 모두 번역하여 내놓았고 시디롬으로 제작하여 컴퓨터로도 편리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도로명에 한자를 병기하는 것도 불필요한 군더더기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도로명에 한자를 병기하겠다는 것인가?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도움이 되면 관광수입도 늘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계산이 있는지 모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중국과 일본은 모두 간소화된 한자를 쓰는데 우리는 전통적인 정자를 쓰고 있으니 병기를 해주어도 읽을 수가 없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의 약자가 서로 형태가 다르니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진정으로 일본과 중국을 상대로 관광 수입을 올리려면 관광객이 몰리는 지역이나 상가에 일본어와 중국어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이것은 유럽과 미국 등의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역에 한글로 된 안내판이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거둘 것이다.

끝으로 정부 당국의 이 문제 처리 방법이 심히 유감스럽다. 최근에 열린 문화관광부의 국어정책자문기구회의에서는 이 문제에 찬성 결정을 한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이를 국무회의에 상정하여 기습 처리하려는 졸속 행정을 과시하였다.

이현복<서울대교수·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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