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작가정신」의 「소설향 시리즈」

  • 입력 1998년 12월 7일 19시 12분


이, 가슴 설레는 신춘문예의 계절, 어디선가 문득 맡아지는 그윽한 ‘소설향(小說香)’….

작가정신에서 펴내는 ‘소설향 시리즈’. 거기에는 그런 문학의 향기가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문학의 고향에 돌아온 듯한 아늑함이 있다. 일상적인 삶의 내재율(內在律) 속에 미처 다 담지못한 지난 시간의 울림이 느껴진다.

이윤기 김채원 조경란 배수아…, 한목에 대하는 이들의 신작(新作) 중편소설들. 뿌듯하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그들’이 이렇듯 한 자리에서 만났다. 한 상(床)에 차려진 다른, 너무도 다른 문학성과의 조우. 그래서 ‘소설향’은 야릇한 포만감을 준다.

특히나 새내기인 배수아와 조경란의 작품에 눈길이 쏠린다.

조경란의 ‘움직임’은 가족 이야기다. ‘가족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이상한 동물원’ 이야기. ‘누구의 뱃속도 빌지 않고 세상에 혼자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라는 주인공. 인물과 사건들은 시간마저 완류(緩流)로 흐르는, 너무 느리게 흐르기에 마치 정지된 것만 같은, 자의식 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가족은 작가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어떤 것이다. 그것은 ‘악마가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음모’다. 가족이라는 저주(詛呪). 작가는 이 소설에서 모처럼, 그 저주의 마법을 푸는 열쇠를 내놓는다. 다름아닌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을 주시옵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위해서는 그것에 도전하는 용기를 주시옵고, 또한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려주옵소서….’

배수아는 참으로 특이한 작가다.

그를 아는 사람은 세번 놀란다. 정체불명의 그 ‘요요(妖妖)한’ 문체에, 전혀 뜻밖의 그 천진한 웃음에, 그리고 병무청 공무원이라는 그의 직업에.

소설 ‘철수’는 신세대적 일상과 그 일상에 숨어있는 존재의 불안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우울하면서도 무섭지만 우리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인간과 생의, 그 음습한 바닥을 깊이깊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허망해한다.

그의 소설은 그러나, 쉬 설명되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도 말하지 않던가. “나에게 있어서 소설은 본능이기도 하도 체질이기도 하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열 같기도 하다….”

그래선가. 소설은 마약(麻藥)처럼 씌여진다. 몽환(夢幻)처럼 읽힌다. 불꽃을 떠나는 촛농처럼 흐느적거리며 흘러내린다.

‘날 태워봐. 기름을 바르고, 내 몸에 불 붙여봐. 마녀처럼 날 화형시켜봐. 쓰레기 봉지로 날 포장해서 소각로 속으로 집어던져봐. 나는 다이옥신이 되어 너의 폐 속으로 들어간다. 내 얼굴을 면도칼처럼 가볍게 긋고 스며 나오는 피를 빨아봐. 고양이처럼 그 맛을 즐겨봐. 그래서 나는 피투성이가 되고 싶어….’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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