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별」박두진시인 지다]강은교/선생님 영전에

  • 입력 1998년 9월 17일 19시 13분


선생님 지금 우주의 어디쯤 걸어가고 계십니까. 우주의 어디 쯤에서 뒤를 돌아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 작은 ‘지구’라는 곳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어느 흰 구름 위에 걸터 앉으신 채 바라보고 계십니까.

“지구라는 곳이 저렇게 작았던가?…허허허…”하시면서 말입니다.

언제였던가. 전화선 속으로 달려오던 선생님의 카랑카랑하지만 따뜻하시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담쟁이 넝쿨이 많은 집만 찾아. …언덕을 몇개 지나야 돼. 대문은 아주 낡았어…”하시던 그 목소리.

그 목소리의 약도만을 지표삼아 찾아가던 길. 저는 그 목소리의 끝에서 선생님댁의 뜰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때 뜰 안에 줄지어 앉아있다가 휘둥그레해진 저에게 살짝 웃음을 던지던 수석들과 그리고 햇빛.

눈에 선합니다.

햇빛을 안고, 돌 하나하나를 가리키시며 그 돌과 인연을 맺던 이야기를 하시던 모습, 아, 눈에 선합니다.

“그 많은 돌 중에서 수석을 어떻게 찾죠, 선생님?”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제게 “돌밭을 걸어다니다 보면 나를 떠억 바라보고 있는 돌이 있어. 보는 순간, ‘너구나’하고 중얼거리게 하는 돌이…. 이것은 어느 강가였더라…. 나는 보자마자 알아보았어. 우리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순간, 그 돌의 꿈은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아, 선생님,선생님은 제가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되었는 줄 아십니까? 흰 옥양목 커튼이 날리던 여학교 교실에서, 학교신문에 실린 선생님의 시 ‘해야 솟아라 해야…’를 읽고 알 수 없는 리듬의 전율을 경험한 뒤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대학원 강의 끝에 커피를 사 주시겠다는 선생님을 무슨 일인가 있어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 그때도, 그 이후에도 문득문득 후회로 찾아오곤 했었는데, 오늘 선생님이 아주 가시니 정말 후회가 되는군요. 선생님께서 그 옛날 저의 정신에게 준 ‘리듬’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선생님이여, 부디부디 지상에 남아있는 저희들을 살피소서. 선생님같이 돌의 꿈을 꾸면서 이 세상을 깊고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가끔은 생전에 선생님이 하신 것처럼 물구나무 서서, 보다 맑아진 피를 흐르게 하소서.

강은교(시인·부산 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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